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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챌린저호 폭발 사고의 원인, 그리고 사고를 막으려 했던 사람들
    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3. 1. 28.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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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6년 발생한 챌린저호(STS-51-L) 폭발 사건의 원인은 추진체 부품 중인 결합부 고무 패킹(O-링)의 저온 손상 때문이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NASA의 그릇된 의사결정구조와 추진체 제작업체 모턴 사이어콜사의 안일한 판단이 원인이었다. 고체로켓추진체 제작 프로젝트 담당 기술자였던 로저 보졸리와 로버트 이블링은 발사를 막으려 했지만 결정권자들을 설득하는데 실패했다. 이들은 기술자적 양심과 직장과 동료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 자신이 살인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 몰렸다. 결국 이들의 증언은 익명으로 "사전 경고가 있었다"라는 내용으로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이들 외 동료 기술자 에이널드 톰슨, 브라이언 러셀도 함께 했다.) 그러나 발사 직전 발사를 막으려 했던 사실 때문에 이들이 특정되는 것은 쉬운 일이었고 이들은 자의 반 타의 반의 퇴사를 당했다. 이후 로저 보졸리는 실명으로 진실을 처음 공개했는데 이후 동료들과 지역 여론의 공격을 받았다.

    로저 보졸리


    보졸리는 사고 발생 후 NASA 사고조사단에 참가하여 모든 정황과 진실을 밝혔지만 O-링의 문제점은 전체 보고서에 겨우 몇 단락 들어가는데 그쳤고 자체보고서에는 조립 하자 가능성 등이 장황하게 언급되었다. 보졸리는 노골적인 은폐 원인 시도에 맞서 O-링의 결함을 증명하는 문서를 여러 부 복사하여 숙소와 자동차 등에 분산하여 보관했다. 결국 그 진실은 조사위원회 일원이던 도널드 쿠티나 공군 소장에 의해 익명으로(대놓고 NASA를 공격할 수 없는 위치였다) 조사위원 중 하나였던 리처드 파인만에게 몰래 전달되었고, 이후 파인만은 TV 생중계 청문회에 문제의 O-링을 들고 나와 구겨진 채로 차가운 물에 담가진 O-링이 원상태로 돌아가지 않는 모습을 실제로 실험으로 보여주며 대중들에게 진실을 밝혀냈다. 그와는 별개로 보졸리와 이블링은 NASA와 직장으로부터 다각도로 핍박을 받았다. 직장 동료가 대놓고 그의 아내를 협박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직장 동료를 포함한 브리검 시 주민 대다수는 몰몬교도였고 주말에도 교회에서 얼굴을 마주쳐야 하는 이들이었다. 오죽하면 의회가 나서서 사이어콜사에게 이들에 대한 인사 불이익을 시정하라고 할 정도였다.

    보졸리는 사고 이후 폭식으로 18kg나 살이 쪘고 자신을 '미쳤다'라고 몰아갈 것을 염려해 스트레스 장애 치료조차 거부했다. 사소한 분노를 참지 못하는 공격적인 성격으로 바뀌었다. 결국 스트레스로 왼손 마비와 시각 이상이 생겨서야 병원을 찾았다. 이후 1988년 NASA의 노골적인 여성차별에 맞섰던 미국인 첫 우주 비행사인 샐리 라이드의 지지를 받고 마음에 추스른 그는 이후 숨을 거둘 때까지 300여 차례 국내외 대학과 연구소 강연으로 '기술자의 윤리와 책임'과 '데이터에 근거한 의사결정의 중요성' 등에 대해 전도했다. 미국과학진흥협회는 1988년 그에게 '과학 자유와 책임상'을 주었다. 사고 발생 이후 26년 후인 2012년 보졸리는 암으로 사망하였다.

    보졸리와 함께 챌린저호 발사를 막으려 시도했던 이블링은 사고 발생 후인 86년 회사를 떠났다. 그는 자책과 우울증에 시달리며 조용히 운둔했고 89년 이후 철새보호 시민단체의 자원봉사자로 살았다. 때마침 솔트레이크 범람으로 제방이 무너졌을 때 그의 공학 기술을 십분 발휘하여 관개시설과 수로 보강 등의 기술적인 분야를 진두 지휘했고 그 공을 인정받아 루스벨트 환경보존상과 올해의 자원봉사상 등을 받았다. 조용히 살던 그는 죽기 몇 달 전인 2015년 다시 한번 언론에 나서서 자신이 지난 세월 혼자 감당해야 했던 자책과 죄의식을 토로했다. “나는 좀 더 노력할 수 있었고, 좀 더 노력했어야 했다.” “신은 그 일을 내게 맡기지 않았어야 했다. 나중에 신을 만나면 따져 물을 거다. ‘왜 나였냐?’고, ‘당신은 패배자(loser)를 선택했다’고.” 라며 울먹이던 그의 인터뷰는 많은 시민들의 반향과 지지를 이끌어내었고, 그의 전 보스는 그에게 사과했으며, NASA에서도 "우주비행사들이 보다 안전하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용기 있게 발언해 준 이블링 같은 이들에게 경의를 표한다"라고 성명을 내었다. 그제야 마음의 짐을 덜은 이블링은 향년 89세를 일기로 2016년 사망했다.

    로버트 이블링

    당시 NASA의 프로그램 매니저였던 로렌스 멀로이는 1960년부터 NASA에서 하중 및 역학 전문가로 일해 왔고 이후 아폴로 프로그램에도 참여했다. 이후 1982년 마셜 우주 센터의 고체 로켓 부스터 프로젝트 책임자가 되었다. 사고 이후 청문회때 나사 측으로 참가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얼굴이 알려졌으며 대중과 언론들에게 비극의 책임자로 가장 많이 지목되었다. 사고 이후 멀로이는 과학 및 엔지니어링 부국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우주왕복선 탑승 승무원 중 한 명인 마이클 J. 스미스의 미망인이 그의 과실을 추궁하며 1,510만 달러의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결국 멀로이는 NASA의 승진 제안을 거절하고 1986년 7월 조기 퇴직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후 내쉬빌 테네시의 조용한 교외 지역에 살고 있다고 하는데 2020년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챌린저: 마지막 비행"에 출연해 당시 상황에 대해 "내 책임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죄책감은 없었다."라고 발언했다. 이 발언이 현재 그의 생각인지 사고 당시 상황에 대한 설명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로렌스 멀로이


    관리자들이 현장 기술자들의 발사 중지 요청을 무시하고 발사 강행을 한 이유는 여러 외부 요인들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NASA가 힘 있는 기관이 아니라 정부에 손을 빌려서 예산을 타 내야 하는 처지였고 (물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이번 챌린저호 발사에는 헬리혜성 관측 이벤트와 함께 홍보를 위해 야심차게 진행했던 '우주 교사 프로그램'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 발사를 성공시켜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미 이전 콜롬비아호 계획이 늦어져서 밀렸고 그 이전 발사 계획도 기상문제로 몇 번이나 연기된 상태였다. 그래서 이번 발사는 콜롬비아호 도착 후 겨우 열흘 만에 다음 발사가 계획되었고, 그것도 4번이나 연기된 상태였다. 심지어 당일 발사도 오전에 화재 감지 장치 오작동으로 몇 시간 연기되었다. 특히 이날 챌린저호 발사 후 레이건 대통령이 기념 연설을 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성공적인 우주비행선 발사 그림이 필요했다. 또한 이전에도 유사한 사례에 정상적으로 발사된 사례가 여럿 있었기 때문에 발사를 강행했다. 실제 이후 청문회에서 관리자들은 '발사를 중지시킬만한 결정적 요인이 없었다'라고 항변하기도 했다.

    로켓을 제작한 모턴 사이어콜사 역시 NASA와 2차 계약을 맺기 직전이던 상황이어서 부품결함 문제제기에 민감할수밖에 없었다. 사이어콜 사는 처음엔 발사에 회의적이었으나 경영진이 참여한 회의에서 입장을 바꿔 발사를 권유했다. 당시 NASA는 고체추진로켓 제작을 다른 회사에 맡기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NASA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경영진은 "이제는 공학자의 모자를 벗고 경영자의 모자를 쓸 때"라며 발사 권고로 의견을 번복했다. 최종결론이 뒤집어지자 캐네디우주센터 현장에 있었던 사이어콜사의 고체추진로켓 디렉터였던 앨런 맥도날드는 본사에서 날아온 문서에 서명을 거부했으며 결국 부사장인 조 킬민스터가 서명한 후 팩스로 전송되었다. 모턴 사이어콜 사는 사건 이후 18억 달러에 달하는 나사의 신형 추진기 개발 계약을 따냈으나 NASA의 우주왕복선 프로젝트가 3년간 전면 중단되면서 회사 자체가 존폐 위기에 처했고, 직원들은 실직 위기에 몰렸다. 유타주 브리검시에 있는 공장은 "살인자들"이라는 낙서로 뒤덮였다. 이후 모턴 사이어콜은 모턴과 사이어콜이 분사되었으며 여러 번의 M&A 후 현재는 오비털의 일부가 되었다.

     

    앨런 맥도날드


    승무원들의 캐빈은 공중에서 폭발 때 분리되어 15km 높이에서 시속 320km의 속도로 추락했다고 한다. 영상판독에 의하면 폭발 후에도 살아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실제 내부에 장착되어 있는 비상용 호흡장치 7개 중 3개가 활성화되어 있는 채 잔해에서 발견되었다. 다만 폭발과 추락 당시 20G에 달하는 충격으로 인해 살아있더라도 거의 의식이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들의 시신은 사건 발생 후 약 한 달이 넘은 2월 7일 발견되었는데 조사결과 해수면과 충돌할 때 받은 엄청난 충격이 직접적인 사인이었다고 한다. 위클리 월드 뉴스라는 찌라시 언론에서 조종사들이 죽기 직전 "오 마이갓", "이런 식으로는 죽고 싶지 않아", "착륙 준비를 한다" 등의 대화록을 입수했다는 기사를 내기도 했는데 새빨간 거짓 기사인데 마치 이것이 사실인 양 돌아다니기도 했다. 심지어 이들의 생전 모습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의 사진과 미국의 사회보장 장애보험 사망자 기록에 이들의 정보가 없다며 이들이 죽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챌린저호 승무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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