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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고기를 의외로 많이 먹었던 우리 선조
    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2. 6. 24.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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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협의 풍속화집 중 고기굽기

    의외로 우리 선조들은 고기, 특히 소고기를 먹을 기회가 많았다고 한다. 세종 7년인 1425년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귀신에게 제사하고 손님을 대접하는 데 쓰거나 먹기 위해 끊임없이 소를 잡는데, 1년 동안 잡은 소가 수천 마리에 이르렀다.' 라는 문구가 있는데 제사때마다 소고기를 올렸고, 명절마다 소를 잡아 잔치를 했다고 한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조선 후기인 17세기 영조때에는 매일 소 1천마리씩을 잡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당시 조선 인구가 약 1,500만이었는데 키웠던 소가 100만마리였다고 한다. 당시는 농업이 근간이었던 시대라 사람 10명의 노동력을 낼 수 있는 소는 매우 중요해서 국가 차원에서 소를 많이 길렀고 번식을 많이 하도록 노력을 했다. 그래서 소는 빈부는 물론 국력을 재는 척도였다. 물론 그러다보니 소를 귀하게 여겨 소의 수가 줄어들거나 전염병이 돌면 우금령을 내려 소를 잡는 것을 금지하기도 하였으며 이를 어기면 온 가족을 변방으로 이주시키는 전가사변형에 처하거나 태형, 재산몰수, 관직파직 및 추방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 소고기는 권력의 상징이기도 했다. 임금은 국왕의 품격을 상징하는 소고기를 먹었는데 세종은 고기가 없으면 식사를 하지 않았다고 하며, 연산군은 소를 부위별로 즐기는 미식가였으며 이전까지 제사 음식으로 쓰이던 소고기를 일상 음식으로 쓰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소고기가 국왕의 품격을 상징했기에 왕위 찬탈을 모의하는 반역자들은 식탁에 소고기를 올렸다고 한다. 명종 때 박세번이라는 사람이 사직동에서 무인들과 소를 잡았다가 반역의 흔적이 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으며, 조선 전기의 무신 남이는 국상 기간 중에 몸보신을 위해 소고기를 먹었다가 잡혀가기도 했다. 사대부들도 소고기를 많이 즐겼다. 오죽하면 '소 잡기를 닭 잡듯 한다'라는 속담이 그래서 나왔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엘리트 집단인 성균관 유생들에게도 소고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배려했는데, 한양도성내에서 유일하게 도축이 가능한 장소가 성균관이었다. 유생에게 제공되고 남은 고기는 헌방을 통해 일반에게 판매되어 성균관 유지비로 사용되었다. 그밖에도 군인들에게도 부족함 없이 제공되어 사기를 올리는데도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서는 농업의 핵심인 소를 지키기 위해 관청의 허가 없이 도축을 금지하는 우금령을 1대 태조부터 23대 순조때까지 총 22번 발령했다. 조선 초기에는 이를 어기면 위에서 언급했듯 엄히 처벌받았으나 고종 시절에는 경범죄 정도의 처벌을 받았다고 한다. 이는 소의 수 자체가 늘기도 했지만 숭불 영향이 남아있던 조선 초기에 비해 유교가 퍼지면서 육식에 대한 거부감이 줄었던 이유도 있었다. 한편 고기의 유혹이 너무 강렬했기에 백성들은 우금령을 피하기 위해 여러 꼼수를 부렸는데 유독 명절만 다가오면 소가 다리를 다쳐 폐사해야 한다는 신고가 관청에 많이 들어왔다고 한다. 또한 전염병인 우역이 돌면 걸린 소는 물론 걸리지 않은 소도 잡아먹었는데 우역으로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어 먹을 것이 없던 상황에서 비상구휼식량의 역할도 했다. 조선 후기때 양반들은 겨울날 '난로회'라 하여 난로에 옹기종기 모여 난로를 쬐며 고기를 구어먹었는데 김홍도의 그림에도 남아 있다. 또한 우금령을 피하고 한번 소를 잡을 때 최대한 많은 부위를 먹기 위해 발골기술이 더욱 발전했다. 백정들의 발골로 인해 한국은 120여 부위로 더 세분화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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