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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설의 아들로 산다는 것 - 차두리
    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2. 10. 7.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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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두리는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뛰던 레버쿠젠 유소년 클럽에서 뛰긴 했는데 육성반이 아닌 보급반이었음. 이후 아버지가 울산 감독으로 부임하자 아버지를 따라 귀국했고, 양정초등학교로 편입했으며, 이후 울산현대중으로 진학했지만 아버지가 감독에서 경질당하자 서울로 상경, 배제중-배재고를 거쳐 고려대에 진학했음.

     

    사실 당시 차두리가 아버지 빨로 고대 간 거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는데 배재고 주전 공격수였을 당시 전국고교축구선수권 득점왕을 차지했었음. 고2 때부터 갑자기 엄청나게 커서 힘과 스피드를 갖추게 되면서 대학교와의 연습경기에서도 상대 대학선수들과 몸싸움에서 상대를 날려버렸다고 함.

     

    사실 차두리는 자기가 아버지만한 재능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 은퇴 후에 축구 관련 기자를 하고 싶어서 학과도 신문방송학과를 선택했는데 아버지가 1998 월드컵 경질 후 당한 일을 보고 학을 떼고 진로를 바꿨다고 함. 대학 때는 부상(피로골절로 독일까지 넘어가서 수술을 받기도 했음) 때문에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했는데, 2002 월드컵 대표팀에 뽑힌 걸 보고 아버지빽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음. 

     

    근데 오히려 그때는 차범근과 협회 사이가 안 좋았던 시절이라 오히려 차별을 받았으면 받았을 시절이었음. 차두리가 발탁된 이유는 히딩크 감독이 훈련하는 모습을 보고 뽑은 케이스였음. 물론 2002 이후 차두리가 분데스리가로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빽이 맞음... 여담으로 당시 국내 분위기가 지금과 달라서 해외진출을 안좋아했고, 고려대가 고연전에 뛰고 가게 하기 위해 이적동의서 발급을 차일피일 미루는 만행도 저질렀음. (그래서 차두리가 고려대에 서운한 감정이 많다고) 

     

    처음에는 아버지와 같은 포지션인 윙으로 뛰었고 나름 활약을 보이긴 했지만 그렇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었음. 그러다가 마인츠 당시 위르겐 클롭 감독의 제안으로 포지션을 라이트백으로 전환하는 도전을 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음. 마인츠때는 풀백과 윙을 번갈아 봤지만 코블렌츠에 가서 본격적으로 윙백으로 자리잡으면서 포텐이 터짐. 발 빠르고, 체력 뛰어나니 최고의 풀백자원이었던 것.​



    여담으로 차범근은 언젠가 자신이 살면서 후회되는 일 중에 하나가 두리가 클 때 자기가 너무 바빠서 아들을 직접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 적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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