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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
    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2. 12. 2.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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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티즈버그 연설. 1863년 11월 19일. 게티즈버그 전투 몇 주 후 마련된 국립묘지 봉헌식에서 링컨이 한 연설.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이 인용된 연설 중 하나이자 가장 위대한 연설로 손꼽힌다. 그해 6월 벌어진 게티즈버그 전투는 북부군의 승리로 끝나면서 남북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 전환점이 된 전투였다. 양군 합계 15만이 넘는 병력이 투입되었는데 전투 후 게티즈버그 벌판에만 양군 7,500명 이상의 병사와 5천 마리가 넘는 말의 시체가 뒹굴고 있어서 2400명밖에 없는 게티즈버그 마을 사람들에겐 큰 문제였다. 결국 주 예산을 편성하여 국립묘지를 건설하게 되었다. 묘지 건설 후 봉헌식에서 링컨이 한 300 단어짜리 연설이 바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게티즈버그 연설이다. 사실 당시 봉헌식 식순에 따르면 원래 메인 연설은 전직 미 국무장관이자 매사추세츠 주지사, 주영 미국대사 등을 거친 에드워드 에버릿의 2시간짜리 연설이었고 링컨 대통령은 간단한 봉헌사만 하게 되어 있었다. 실제 링컨은 고작 행사 15일 전에야 헌사 의뢰를 받았는데 '설마 15일밖에 안 남았는데 오겠어?'라고 예의상 보낸 초대였다.



    링컨의 봉헌사에 대한 평가는 다양했다. 링컨은 자신의 연설이 대중들에게 깊게 파고들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라는 기록도 있으며, 별로였다는 반응과 감동적이었다는 평가도 나뉜다. 링컨의 봉헌사 전에 2시간짜리 연설을 하고 청중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던 당대의 명 연설가 에버렛은 링컨에게 "제가 했던 두 시간짜리 연설도 각하의 2분 만에 하신 연설만큼 핵심에 다가갈 수 있었다면 정말 좋았을 것입니다."라는 편지를 썼고 링컨은 "제 연설이 완전히 실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 기쁩니다."라고 답했다. 언론의 평가는 지지 정당에 따라 극명하게 갈렸다. 민주당에 우호적이었던 시카고 타임즈는 "대통령이 평범한 일용잡부들이나 할 만한 연설을 했다"라고 비난했던 반면 공화당에 우호적이었던 뉴욕 타임즈는 대호평을 내렸다. 당시 지역 공화당 신문에서는 연설 전문을 인쇄하고 "완벽한 보석"이라고 평했다. 당시에는 최대한 말을 어렵고 길고 복잡하고 화려하게 말하는 것이 지적이라고 인식되던 시대였기 대문에 현대적인 관점에서 간결하고 명료하며 우수한 구조를 갖추고 있어 명연설로 평가받는 링컨의 연설은 너무 시대를 앞서간 연설이었다.



    또한 당시에는 두세시간의 연설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유명인의 연설 한번 듣겠다고 몇 시간을 이동했던 때였기 때문에 이미 행사로 반나절 이상의 행사를 지켜봤던 15,000여 관중들은 연설이 너무 짧아서 당황했을 수도 있다. 실제 이날 연설을 한 링컨의 사진을 제대로 찍은 사진이 없는데 링컨이 연설을 시작하고 사진사들이 카메라 점검을 하던 와중에 링컨의 연설이 끝나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는 사진 찍는 게 매우 어렵고 복잡한 작업이었다.) 하여간 이후 링컨의 연설은 링컨 기념관 남쪽 벽의 현판 아래 기록되었고, 시간이 지나며 명연설로 재평가받았으며 미국은 물론 전 세계로 퍼져나가며 대중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마틴 루터 킹의 연설에서도 언급되었으며 프랑스 제5공화국이 제정한 프랑스 헌법에도 링컨의 연설이 인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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