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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가 지금 먹는 배추를 만든 우장춘 박사
    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2. 12. 13.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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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지금 흔히 보는 속이 꽉 찬 배추를 만든 사람은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이다.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 우범선은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던 조선인 훈련대 2대대장이었다. 중인 출신으로 친일 개화 세력이었던 그는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일본을 본보기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하며 사건 이후 일본으로 망명해 일본 여자와 결혼하고 우장춘을 낳았다. 우범선은 우장춘이 5세 때 고종의 최측근인 고용근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후 보육원에서 자라 성장한 우장춘은 박사가 되면 조선인으로서 받는 차별이 덜해질 거라 믿었고 사이타마현 고노스 농장에서 일하는 와중에도 공부를 계속했다. 이종 식물 간 교배가 가능하다는 것을 세계 최초로 증명한 '종의 합성' 논문(도쿄대 박사학위 논문, 1936년)으로 세계적인 육종학자의 반열에 올랐던 우장춘 박사는(박사 학위에 올랐음에도 처우는 그닥 나아지지 않았고 차별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광복 이후 안면이 있었던 김종 농림국장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1950년 한국으로 오게 된다.

     


    ​당시 한국은 독립 이후 일본인 농학자들이 고국으로 돌아가 버리고 일본산 종자를 이용하던 배추는 특히 큰 타격을 입어서 농부들은 일본에서 밀수로 들어오는 종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우장춘 박사는 한국에 오자마자 배추와 무 종자 개발에 매달렸다.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소장을 맡으며 종자 연구에 매진해 1952년 진도에서 확보한 7천여 톤의 종자가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무와 배추의 원형이 되었다. 그 덕에 10년 전까지 중국 원산이라 차이니즈 캐비지(Chinese Cabbage)라 불리던 배추에서 한국산 배추만 김치 캐비지(Kimchi Cabbage)로 분리, 등재되는 결과도 얻었다. 또한 우장춘 박사는 '종자 독립'을 목표로 국내 재래종 및 수입 품종의 씨앗을 모아 개량에 나섰으며 제주 감귤이나 강원도 감자 무 품종개량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제주도의 명물이 된 유채와 시골 길거리에 코스모스를 심자고 제안한 사람도 우장춘 박사였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농림부 장관직을 주겠다고 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육종사업과 후진양성에만 매진했는데, 가족을 다 일본에 두고 홀로 한국어도 거의 못하면서 한국으로 돌아온 그의 유일한 목표였다.

    우장춘 박사가 길러낸 제자들은 학계로 진출하고 종자업계로 가면서 국내 종자산업이 발전하는 토대가 되었다. 국내를 대표하는 여러 종자회사들의 탄생에는 우장춘 박사의 공이 크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우장춘 박사가 씨 없는 수박을 만든 사람이라는 오해가 퍼졌었는데 우장춘 박사는 "이런 신기한 것도 있다" 라고 한국에 소개했을 뿐인데 이게 와전되어 교과서에도 쓰였지만 지금은 수정되었다. 한국에 돌아온 10여 년 동안 큰 업적을 세웠지만 친일파의 아들이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의심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이 출국을 불허해서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주변 지인과 그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고 성금을 보내줬다고 함) 1959년 지속된 밤샘과 노동으로 몸이 쇠약해진 우장춘 박사는 십이지장 궤양으로 수술을 받으나 회복되지 못하고 결국 사망했다. 임종 하루 전 건국 이후 2호인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상했는데,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조국이 나를 인정했다."였다고 한다. 친일파의 후손이나 혈혈단신 한국으로 돌아와 조국에 매우 훌륭한 업적을 남긴 분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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