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
당파/삼지창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4. 4. 5. 00:20
엄밀히 말하면 갈래창의 일종인 삼지창과 당파는 비슷한 모양이긴 하지만 그 근본이 다르다. 날이 3개, 혹은 4개 달린 갈래창은 원래 농어업이나 수렵도구에서 발전한 것으로 우리나라의 경우 이미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다. 조선 초에 만들어진 '국조오례의'에서는 극(戟)이라 하여 삼지창의 일종을 소개했는데 나무자루는 붉게 칠하거나 검게 칠하고 길이는 1장 6척(약 336cm)에 달했다. 조선 후기에는 주로 국왕의 의장행렬이나 관아의 의장물로서 사용되었는데 군왕과 관아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는 상징물이었다. 물론 본격적으로 사용된 건 아래 서술한 임진왜란을 겪은 후의 조선 후기였다. 당파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받아들이면서 도입한 병기이다. 왜구가 쳐들어오자 명나라는 일본군의 특성을 감안해..
-
겸상 아버지 살인사건은 진짜 있었던 일인가?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3. 9. 14. 00:20
조선 중종때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겸상을 했다는 이유로 용서해 줬다는 이야기가 인터넷에 많이 돌아다니는데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사실이 아니다. 중종 때 일어난 것은 맞는데 아들이 아버지를 죽인 게 아니라 말싸움하다가 밥사발을 던지는 모습을 이웃집이 보고 관아에 신고한 사건이다. 물론 당시에는 아들이 아버지를 폭행하는 것만으로도 사형을 받을만한 대죄였기 때문에 결국 아들이 잡혀왔는데, 황해감사 김정국이 아들에게 '너 아버지 폭행죄는 사형인 거 모르냐?' 고 하자 아들이 '죄인 줄 몰랐다. 평상시에도 서로 싸우고 물건 집어던지고 하는 게 일상이라 사형까지 되는 죄인 줄 몰랐다. 만약 그게 사형이라는 걸 알았다면 하지도 않았고 스스로 자백하지도 않았을 거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
과거 왕 이름을 함부로 못썼던 이유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2. 7. 6. 20:13
과거 왕은 절대 존엄의 존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왕의 이름은 함부로 말할 수도 쓸 수도 없는 존재였으며, 다른 용도라고 하더라도 왕의 이름에 쓰인 문자를 문서에 쓸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왕의 이름을 정할 때 백성들을 배려해 실생활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한자를 활용해 외자로 휘(諱, 태어날 때 받은 진짜 이름)을 지었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면서 이름을 '단(旦)'으로 바꿨으며, 그밖에 세종대왕의 휘는 이도(李祹), 영조의 휘는 이금(昑), 정조의 휘는 이산(李祘), 순종의 휘는 이척(李坧) 등이었다. 태종 이방원(李芳遠)과 단종 이홍위(李弘暐)의 경우는 조선 초기라 이러한 체계가 잡히기 전이라 이름이 두자였다. 태조와 정종은 자신의 이름을 개명해 백성들의 불편을 줄여주어 건국..
-
소고기를 의외로 많이 먹었던 우리 선조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2. 6. 24. 11:46
의외로 우리 선조들은 고기, 특히 소고기를 먹을 기회가 많았다고 한다. 세종 7년인 1425년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귀신에게 제사하고 손님을 대접하는 데 쓰거나 먹기 위해 끊임없이 소를 잡는데, 1년 동안 잡은 소가 수천 마리에 이르렀다.' 라는 문구가 있는데 제사때마다 소고기를 올렸고, 명절마다 소를 잡아 잔치를 했다고 한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조선 후기인 17세기 영조때에는 매일 소 1천마리씩을 잡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당시 조선 인구가 약 1,500만이었는데 키웠던 소가 100만마리였다고 한다. 당시는 농업이 근간이었던 시대라 사람 10명의 노동력을 낼 수 있는 소는 매우 중요해서 국가 차원에서 소를 많이 길렀고 번식을 많이 하도록 노력을 했다. 그래서 소는 빈부는 물론 국력을 재는 척도였다..
-
조선시대 혼인장려정책 추진 이유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2. 6. 13. 16:41
현재도 그렇지만 과거 농경사회에서는 인력은 즉 노동력을 뜻하고 노동력은 국가 경쟁력을 뜻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을 장려하여 출산을 늘리고, 출산을 늘려서 인구를 늘리는 정책은 위정자의 의무였다. 또한 종교적 의미도 있었는데 남녀가 혼인하여 함께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과년한 남녀의 비혼이 화기(和氣)를 상하게 하여 국운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이가 차도 결혼 못한 남녀가 있으면 결혼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사실은 말이 추진이지 결혼을 강요했다고 한다. 또한 일반 양민들이 아닌 양반들에게 혼인은 가문의 존속이 달린 문제였다. 그러다보니 하루라도 빨리 후손을 얻기 위해 혼인 연령은 점점 낮아졌다. 여성의 경우 임신이 가능한 17세 전후로 고정되었으나 남성의 경우 15.5세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