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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성채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3. 3. 6. 00:50300x250
구룡성채(九龍城寨). 홍콩 구룡반도에 있던 슬럼가. 원래 청나라의 국경 요새였으나 홍콩이 영국령이 된 후 이곳만 청나라의 영토로 남게 됨. 이후 2차 대전 때 홍콩을 점령한 일본군이 성채의 성벽을 모두 허물어버렸는데, 이후 일본이 패퇴하자 이곳에 부랑민들이 모여 살게 되면서 슬럼화가 됨. 게다가 이곳의 치안권한을 가지고 있는 '중국'이 중화인민공화국(중국)과 중화민국(대만)으로 갈라져버리면서 관리주체 자체가 붕 떠버림. 구룡반도가 있는 땅인 홍콩 정부와 영국 정부는 구룡성채 안으로 진입을 하지 못했고, 대만 정부는 구룡성채의 관리를 거부하고, 중국은 영국과의 수교를 거부해 버려서 구룡성채는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 말 그대로 치외법권이 되어버림.
이렇게 어떤 국가의 행정력도 닿지 않는 치외법권이 되어버리자 기존 부랑자 외에 범죄자들과 대륙에서 넘어온 난민, 홍콩정부에서 정착을 거부한 난민 등등이 모여들었고,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베트남 보트피플들까지 몰려들어 구룡성채는 점점 더 막장(?)이 되어버림. 삼합회간의 항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온갖 범죄행위가 일어났고, 성매매업소, 도박, 아편굴, 불법의료시설 등등이 자리를 잡았으며 지역의 싼 인건비(빈민들이 많이 산 데다 세금을 낼 필요도 없으니)를 이용한 의류공장이나 식품공장도 성행했다고 함.
경찰력도 전혀 닿을 수 없어서 자경단이 활동을 했고, 불이 나도 꺼 줄 소방서도 없었음. 학교도 당연히 없어서 구세군에서 지은 딱 한개의 학교만 있었다고 함. 당연히 건축법을 지킬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1970년대 사진에 있는 저런 고층빌딩들이 무허가로 우르르 올라감. 당시 인근에는 카이탁 공항이 있어서 주변 지역은 고도규제가 있었으나 당연히 구룡성채는 그런 거 하나도 신경 쓰지 않고 너도나도 막 건물을 올려버림. 왜냐하면 저 위에 이야기했듯 온갖 사람들이 다 몰려들다 보니 인구밀도가 엄청났기 때문. (전체 면적이 우리로 따지면 잠실야구장 정도밖에 안 되는 지역에 최대로 무려 5만 명이 살았다고 함.)
이렇게 고층빌딩들이 우후죽순으로 올라가고, 증축과 개축이 계속되다보니 골목은 미로와 같아졌고 대낮에도 햇빛을 볼 수 없어 전등을 켜고 살아야 했다고 함. 전기와 수도는 남의 꺼를 훔쳐 쓰거나 땅에서 우물을 길어 올려서 생활했다고 함. 재미있는 것은 구룡도 조감도를 보면 가운데에 뻥~뚫린 곳이 있는데 저곳에는 양로원과 유치원이 있었는데 저곳만은 아무도 안 건드렸다고 함. 이후 1984년 홍콩의 중화인민공화국 반환이 결정되면서 구룡성채도 철거될 운명에 처해짐. 총 27억 홍콩달러가 거주하고 있던 주민들에게 보상금으로 지급되었으며, 1991년 11월부터 1992년 7월에 걸쳐 주민들을 강제이주시켰고, 1993년부터 철거에 들어가서 1994년 4월 완료함. 현재 이곳에는 구룡채성공원이라는 공원이 들어서 있음.
치외법권, 무법천지, 마구잡이로 지어진 건물의 숲, 그 숲을 거미줄처럼 엮고 있는 혼란스러운 전기줄들은 많은 사람들의 창작호기심을 자극하여 많은 영화와 애니메이션, 소설의 배경과 소재로 사용되었음. (세로로 높은 슬럼가+높은 빌딩+어두운 배경+머리 위를 날아가는 겁나 큰 비행기 장면이 대표적) 구룡성채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다룬 사진집이나 다큐멘터리도 여러 편 제작되었음. 중국 정부도 구룡성채를 헐기 전 일본인 탐험가들을 투입하여 구룡성채의 지도를 만들게 했다고 함.300x250'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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