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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밥의 유래와 역사
    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3. 6. 7.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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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국밥은 탕반(湯飯), 국말이, 장국밥 등으로 불렸다. 일반적으로 국밥은 따로 먹는 국(탕)과 밥을 간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말아먹는 음식이었다. 국밥은 조선 후기에 서민들을 중심으로 넓게 퍼졌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생산력이 크게 증가하면서 전국적으로 장시와 객주가 발달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또한 이 시기에 청나라와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전국적으로 오일장이 개설되었고 행상하는 보부상의 수 또한 크게 증가했다. 보부상들은 객주, 즉 주막에 묵으며 밥과 술을 먹었는데 이 주막에서 빠르고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국밥을 판매하면서 국밥이 퍼졌다. 국밥이 장국밥, 즉 장시에서 파는 국밥이라고 불리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당시 미리 해 놓은 밥을 부뚜막에서 끓고 있는 국에 밥을 말아 주는 과정에서 토렴 기술도 생겼다. 19세기에 들어서서는 국밥, 즉 탕반만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탕반가 - 오늘날로 치면 국밥거리 - 도 생겼으며, 장시가 크게 열렸던 한양의 수표다리 건너편과 백목다리 건너편엔 국밥 전문음식점들이 즐비했다고 한다. 수표다리 쪽은 양반들이, 백목다리 쪽은 부유한 상인들과 한량들이 주로 다녔다고 한다.

    당시 조선은 고기를 구하는게 어렵지 않았는데, 고기 외에도 내장이나 소머리 같은 부산물도 쉽게 구할 수 있어서 자연스럽게 고기를 곤 국물을 대갱, 태갱이라 하여 가장 높게 평가했고, 나물이나 채소를 이용한 국물은 형갱이라 하여 대갱보다 한 수 아래로 두었다. 사람들은 갈비, 도가니, 우족, 소머리, 소꼬리, 양, 껍데기 등을 이용해서 장국을 끓였는데 이것이 현재 갈비탕, 우족탕, 설렁탕, 꼬리곰탕 등이 되었다. 이러한 문화는 계속되어 일제강점기에도 국밥의 맛과 영양을 칭찬하는 일본인들이 남긴 기록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192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국밥을 '배달'해 주는 가게들이 생겨났다. 수백 명의 설렁탕 배달꾼들이 활동했다고 하며 당시 잡지에는 '요즘 신식 부부들은 새벽부터 밥 하지 않고 느지막이 일어나 설렁탕이나 배달하여 먹는다'라는 글이 실리기도 했다. 이후 국밥집들은 1960년대부터 도축장이 현대화와 기계화되고 고기 소비량이 점점 증가하면서 고기 유통이 활성화되면서 대중화되었고 장시 위주로 형성된 국밥집들도 점차 도심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지역마다 차이를 두어 나름의 레시피로 각자 발전한 것도 이 시기이다.

    20세기까지만 해도 국밥집간의 격차가 존재하여 맛있는 집들이 유명세를 타고 많은 인기를 끌었으나 2010년대 이후 조리기법이 발달함에 따라 상향평준화되었다. 특유의 냄새 때문에 호불호가 갈리고 가게별 편차가 크던 순대국밥이 대표적으로 상향평준화되어 어디든 무난한 퀄리티의 순대국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으며, 지역에 가서야 먹을 수 있던 맑고 진한 육수의 곰탕도 프랜차이즈화되었다. 또한 외식 물가가 오르면서 가성비를 따지면서 "그거 먹을 바에 같은 돈으로 국밥을 먹겠다."라는 밈이 유행하기도 했다. 90년대 TV뉴스에 "요즘 아이들은 우리 한식을 안 먹고 피자나 햄버거만 찾아서 문제다"라는 기사가 나왔었는데 지금 국밥 찾는 사람들이 다 그때 그 애들이다라면서 결국 나이 들면 뜨끈한 국밥을 먹게 될 것이라며 한국인의 피 속에 내재된 국밥의 DNA를 칭송(?) 하기도 했으며, 해외에 나가서도 엄청 인기를 끈다며 우리 국밥의 전 세계적 우수성(?)을 찬양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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