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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환(虎患)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4. 8. 31. 00:10300x250
과거 한반도는 "1년의 여섯 달은 조선사람이 호랑이를 사냥하러 다니고, 남은 여섯 달은 호랑이가 조선사람을 사냥하러 다닌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호환이 잦았다. 수도인 한양도 마찬가지였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호랑이가 창덕궁에 내려와서 새끼를 낳은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조선 영조 때의 기록을 살펴보면 경기도에서 한 달에 120명이, 강원도에서 81명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고 한다. 전국 8도로 넓혀본다면 모르긴 해도 한 해에 적어도 수천 명, 많으면 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호환을 입었을 수도 있다고 유추해 볼 수 있다.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시대를 넘어설때까지 호랑이는 오롯이 지역 정부의 문제였다. 그러다 중앙정부의 힘이 세지고 행정체계가 잡힌 조선 중기부터는 호랑이 사냥 전문 부대인 착호갑사가 운영되었으며 호랑이를 잘 잡아 종 4품에 오른 사례도 있었다. 호랑이 퇴치를 위해서는 임금 허락 없이 군대를 움직일 수 있었는데, 이를 악용하여 인조반정이나 이괄의 난 때 '호랑이를 잡으러 간다'라며 병력을 이동하여 쿠데타에 사용한 적이 있다. 산을 넘을 때 호환을 피하기 위해 여러 명이 뭉쳐 산을 넘었고, 이때 사람들이 모인 곳이 주막이었다.
호환이 어찌나 많았던지 태백산에는 호랑이에게 피해를 당한 사람들의 남은 시신을 모아 장례를 치른 호식총이 160개가 넘게 있다고 한다. 옛날에는 호환을 당해 죽은 사람은 창귀가 되어 호랑이의 종 노릇을 하며 사람들을 호랑이에게 끌고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호식장이라 하여 호환을 당한 사람의 유골은 화장하고 돌무덤을 쌓아 무덤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고 칼이나 쇠꼬챙이를 꽂는 장례의식을 했다고 한다. 호환은 사주팔자에도 있을 정도로 사람들의 일상에 깊게 자리 잡고 있었는데, 여담으로 호랑이가 없는 현대엔 호환을 당할 팔자를 교통사고 당할 팔자로 풀이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고려장이 없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야밤에 깊은 산속으로 노부모를 지게에 싣고 가면 1+1 딜리버리 서비스나 다름없기 때문이라고 농반진반으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런 호랑이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를 담아 산신령 또는 산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심마니들이 산 속에서 호랑이를 만났을 때 정성 들여 엎드려 절을 하면 호랑이가 봐준다는 이야기도 있다.(안 봐준 사람들은 다 죽었다.) 조선 건국 후 200년 동안의 국가정책으로의 호랑이 사냥의 효과로 인조 때에는 호랑이의 수는 많이 줄었으나 역으로 늑대의 개체가 늘어난 일도 있었다고 한다. 한반도에는 호랑이 외에도 늑대, 곰, 표범 같은 맹수들이 서식했으나 일제강점기 때 조선인, 일본인은 물론 러시아나 중국 포수들을 많이 고용하고 육군 병력까지 동원한 해수구제사업과 토목공사, 6.25 전쟁으로 서식처가 파괴되어 멸종했다. 다만 북한에는 십여 마리가 남아 있다는 설이 있다.300x250'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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