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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창제를 반대했다가 파직당한 정창손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5. 4. 5. 00:10300x250
정창손. 조선 전기에 대제학,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집현전 응교로 재임하던 시기에 한글 창제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파직되었다. 사실 당시 세종이 '불만 있으면 기탄없이 반대의견을 올리라'라고 해서 부제학 최만리, 직제학 신석조, 직전 김문 등이 반대 상소를 올렸었는데 세종은 이들 모두를 하루 동안 의금부에 하옥시켰다가 다음날 풀어주었으나 정창손만은 유일하게 파직시켰다.
세종이 극대노하여 정창손을 파직한 이유는 그가 성리학자로서 해서는 안 될 말을 했기 때문이다. 정창손은 한글 창제를 반대하며 '삼강행실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해서 백성들에게 읽게 하고 가르쳐 봐야 사람들이 바뀌지 않는다.' 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누구나 수양을 통해 성인이 될 수 있으므로 평생 수양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라는 조선의 건국이념인 성리학의 기본원칙을 정면에서 부정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유교를 창시한 공자도 논어에서 유교무류(有敎無類)라 하여 '가르침이 있을 뿐 차별은 없다. 사람에게는 귀천이 존재하지만 똑같이 재주에 따라 가르쳐야지 부류가 비천하다고 해서 가르치지 않아서는 안된다'라고 했었으니 여기에 대놓고 태클을 걸어버린 격.
세종이 매우 진노하여 "용속한 선비"라고 발언했으니 세종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다. 실록에 저렇게 남았다는 말은 실제 현장에서는 훨씬 더 심한 말이 쏟아졌을 것이고 사관이 이를 그나마 축약하여 당시 말로 이보다 더 한 욕을 찾기 힘든 '용속한 선비'라고 적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현대말로 따지면 진짜 말 그대로 공무원이 대놓고 "국민은 개와 돼지와 같다. 가르쳐 봐야 아무 소용없다."라고 발언했고, 이 말을 들은 세종이 대로하여 "저 씹선비 새X"라고 욕한 거라고 보면 된다.
파직된 정창손은 이후 세종의 용서를 받아 다시 집현전에 들어오게 되었다. 사람을 함부로 해하지 않는 세종의 성정과 조선 초기 조정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인 그의 업무처리능력이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근데 그 이후에도 세종이 불경 간행을 추진하자 '성리학의 나라에서 불교를 숭상하면 안된다' 라며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물론 이때도 세종에 의해 좌천되었다가 이듬해 복직했다. 이때 문과 중시에 장원급제해서 집현전 부제학의 자리까지 올랐고, 이후에도 불경을 간행하는 세종에 반하여 꾸준히 상소를 올렸지만 세종은 이를 듣지 않았다. 재미있는 건 그런 와중에도 출중한 능력이 인정받아 고려사, 세종실록, 지평요람 등을 편찬하는데 참여했다.
세종 사후 이후에는 우부승지를 거쳐서 대사헌까지 올랐는데 남달리 깨끗하여 절조를 잘 지키면서 자신의 산업을 일삼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어 대제학, 병조판서 등을 지내면서 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고 단종 1년에는 이조판서까지 올랐다. 이후 단종이 물러나고 세조가 왕권을 잡은 후 사육신의 단종 복위 모의를 세조에게 신고하여 세조의 신임을 얻고 우의정 자리까지 올랐다. (생육신 중 하나인 김시습으로부터는 매우 강력한 비난을 받았다.) 이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 자리에까지 올랐다.
1462년 세조에게 '세자에게 양위하고 자리에서 내려오시라' 라고 직언했다가 삭탈관직당했다. 하지만 이후 정계에 복귀해 예종 즉위 이후에는 익대공신 3등에 올랐다. 성종 즉위 이후에는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승품되고 원상이 되었다. 나이가 70이 되어 은퇴를 요청하였으나 성종은 이를 허하지 않고 궤장을 주며 계속 일을 하게 시켰고 1475년 다시 한번 영의정 자리에 올랐다. 이후 1485년에 다시 한번 영의정으로 재임되었으며 1년 후 사직하고 2년 후인 1487년 8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당시 국왕이 청빈재상이라 하여 많은 물품을 부의로 하사했다고 한다.
사망 후 1504년 연산군 시절 갑자사화때 연산군의 생모를 폐출하는 논의에 참여된 죄로 부관참시당했으나 중종 1년에 복원되었다. 여담으로 "집에 유령이 나타난다"라고 하여 예조판서가 "한번 화포로 집을 날려버려 볼까요?"라고 건의했다가 성종이 반려한 집이 죽기 1년 전의 정창손의 집이었다.
정리하자면 영의정을 세 차례나 역임할 정도로 능력이 뛰어난 행정가였다. 풍채가 준수하고 수염이 배까지 내려왔다고 하며 문장과 글씨에 능했다는 평가도 있다. 또한 사사로이 재물을 탐하지 않는 청밸리로 사망 후에도 인정받았다. 다만 훈민정음 반포시 '국민은 개돼지'라며 반대한 것과 사육신을 세조에게 찌른 일 등으로 인하여 "능력과 인간성이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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