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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미터법 - 종합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5. 4. 3. 00:10300x250
미국은 미얀마, 라이베리아 등과 함께 미터법(정확히 말하자면 SI 단위)을 쓰지 않는 나라 중 하나이다. 오죽하면 '미터법을 쓰는 사람은 이민자, 과학자, 마약상들뿐이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전화기를 발명한 그레이엄 벨이 미 의회에서 "우리가 사용 중인 길이와 중량의 도량형은 불필요한 수고가 너무 많이 따릅니다. 그럼에도 그 사실을 직시하고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라고 연설했지만 바뀌는 것은 없었다.
다만 NASA에서는 미터법을 이용하는데 1999년 화성기후궤도선 추락사건 때문이다. 1999년 NASA에서 화성 기후를 관측하는 것이 목적인 기후궤도선을 발사했는데 화성 궤도에서 추락한 사건이 발생했다. 원인을 알아보니 제조사인 록히드 마틴에서 화성 궤도 진입을 위해 필요한 로켓 분사의 총 운동량 변화를 파운드/sec 단위로 계산해서 NASA에 전달했는데 NASA의 엔지니어들이 이걸 kg/sec 단위로 착각하여 자동분사시간 계산 프로그램에 집어넣었고, 그 결과 엔진이 원래 계획의 절반 이하 추력밖에 분사되지 않아서 추락한 것. 이 사건으로 입은 손실은 당시 기준으로도 3억 달러가 넘었으며, NASA의 해당 프로그램 팀은 모두 해고됐다. 이후 NASA는 2007년부터 공식적인 기술 관련 사항에 사용하는 모든 수치를 SI 단위로 표기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홍보영상은 야드파운드를 쓴다.
미국은 왜 미터법을 안 바꿀까? (심지어 미국은 미터협약 회원국이기도 함.) 위에 언급한 1999 화성기후궤도선 추락 사고 같은 큰 사고부터 미국-캐나다 간 국경지역 속도표지판 문제 같은 사소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귀찮으니까 익숙한 대로 쓰자라는 생각 때문이다. 사실 미 정부에서는 옛날부터 바꿔하고 싶어 했다. 3대 토머스 재퍼슨 대통령도 미터법을 도입하려 했고, 1975년 미 의회에서 '미터법 우선 사용 전환령'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39대 지미 카터 대통령은 고속도로 거리 표기를 km로 바꾸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실제 1968년 미 의회는 3년간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미터법 도입 10개년 계획을 수립했지만 기업가들과 시민들의 반대와 여론전으로 패배했었다. 지금도 미 대선 공약 중에 미터법 전환은 자주 나오는 공약이다.
근데 문제는 미터법 전환을 하려 할 때마다 강력한 저항에 휩싸이고 있다. 미터법 도입론자를 공산주의자라고 매도하는가 하면 전환에 따른 비용, 시간, 혼란 문제를 들어 반대하기도 한다. 심지어 미국 연방이 각 주에 미터법을 강제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일부에서는 '우리만 고유의 도량형 쓰는 거 자랑스럽지 않냐?'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미국도 미터법을 쓸 기회가 있었다. 미국 내에서도 계몽주의자들이 많아서 프랑스의 선진적인 십진법 도량형인 미터법을 도입하기 위해 프랑스에 요청했다. 특히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이자 당시 미 국무장관이었던 토마스 제퍼슨은 십진법 체계를 찬양하며 빠른 도입을 원했다. 프랑스는 미국에 요청에 따라 1793년 유명한 식물학자인 조셉 돔메 편에 미터 도량형 측정 기구 2개(1m 측정 막대와 1kg 구리 실린더)를 미국으로 보냈다.
하지만 돔메를 태운 배는 대서양을 건너던 중 태풍을 만나 배가 정상 항로를 이탈했고, 마침 영국 국적의 사략선을 만나게 되었다. 돔베는 인질로 잡힌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감옥에서 옥사했고 약탈당한 정밀한 미터법 도량형 측정 기구들은 경매로 팔려나갔다. 이후 프랑스가 2차 미터법 선교단을 꾸렸으나 이미 토마스 제퍼슨의 임기는 끝났고 과학계의 반대는 계속되었으며 새로 선출된 후임 국무장관은 미터법에 그닥 관심이 없어서 그냥 방치해버려서 미국 건국 초기에 미터법 도입을 할 기회를 잃어버렸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미국의 영향력이 매우 강력한 부분은 전세계적으로 미국 단위계가 표준으로 사용되는 곳도 있다. 대표적인 곳이 항공, 디스플레이, 컴퓨터 분야이다. 특히 항공 부분은 아예 태생이 미국이고 현재까지 미국이 절대적인 지배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미터법을 쓰는 대다수의 다른 나라들도 파운드와 인치, 피트 등의 단위를 사용한다. 미터법을 고수하는 나라들은 러시아와 중국 등 공산국가들뿐이다.
이 단위 문제 때문에 사고가 난 적도 있다. 1983년 에어 캐나다 143편 보잉 767기가 연료 부족으로 김리 공군기지에 불시착한 적이 있었다. 사고 원인을 조사해 봤더니 해당 기체의 연료탑재정보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상태에서 지상요원이 연료계측봉으로 직접 측정하여 급유를 했는데 이때 파운드와 SI 단위를 헷갈려 20,088L를 급유받아야 하는 걸 4,916L밖에 급유하지 못한 것이다. 비행 중 연료가 떨어진 항공기는 조종사의 기지로 인근 김리 공군기지에 글라이더식으로 활강하여 비상착륙했고 다행히 탑승객 69명은 모두 무사했다. 이 사건은 '김리 글라이더' 사건으로 알려진다.
여담으로 이민자와 과학자는 그렇다 쳐도 마약상은 왜 미터법을 쓴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온 데에는 여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한다. 첫 번째 이유는 미국에서 가장 낮은 무게단위가 온스인데 1온스는 무려 28그램이나 한다. 보통 마약은 그램단위로 단가가 수십에서 수백만 원을 호가할 정도로 비싸기 때문에 1온스 미만으로 정량을 따지기 힘들어서 미터법(정확히 말하면 그램)을 쓴다는 것이다. 대신 미국 마약상들도 큰 단위로 계산할 때는 파운드를 사용한다. 또 한가지 이유는 마약상들이 마약을 사들여오는 남미와 동남아가 다 미터법을 쓰는데, 이걸 다시 팔 때 야드파운드로 단위 변환을 해서 파는 게 어려워서 그냥 미터법을 쓴다는 것이다.300x250'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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