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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약용과 정조 일화
    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2. 8. 31.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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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가 정약용을 창덕궁 후원의 연못으로 유배보냈다는 이야기는 정확한 기록이 나오지 않음. 정약용과 정조가 워낙 정약용을 아꼈다고 하는 이야기가 많고, 정조가 등극하고 19년째(1795년) 창덕궁 후원에서 신하를 불러서 꽃구경하고 낚시하는 잔치가 열린 적이 있는데, 그 잔치에서 정조가 부용정에서 배를 띄우게 하고 배 안에서 시를 지었는데 정해진 시간 안에 짓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연못 가운데 있는 조그만 섬에 유배시키기로 해서 몇명이 섬 가운데로 귀양갔다가 금방 풀려났다는 글을 정약용이 남겼는데 이 두가지가 섞여서 그런 일화가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됨.



    정작 정약용은 자신을 아껴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 노론 벽파에서 정약용 형제들 천주교를 믿었다는 혐의로 제거 대상에 오름. 이 때 셋째형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순교를 택하고, 둘째형 정약전과 정약용은 배교를 택해 사형에서 유배로 감형되어 경상도로 유배됨. 이후 큰형 정약현의 사위인 황사영의 백서 사건에 연류되어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지를 옮겨 총 18년 동안이나 유배 생활을 함. 이렇게 유배 생활이 길었던 이유는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간 정약용이 경기도 관찰사 서용보의 비리를 고발하여 파직시키는 공을 세웠는데, 이후 서용보가 다시 복직해 우의정까지 올랐고 순조와 정순왕후의 총애까지 얻으며 노론 벽파의 수장까지 오르게 된 후 정약용을 매우 싫어했고, 정약용이 관리간의 뇌물 주고받은 풍습을 비판하고 본인도 이를 거부해서 관료 사회에서 밉보였던 점도 작용했음. 정약용은 유배기간동안 학문에 몰두하여 이 때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의 실학 저서를 발간했음. 다행히 유배간 강진이 그의 외가가 있는 지역이었고 외가의 장서량이 상당했기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음. 이후 1818년 귀향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1836년 사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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