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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슐린 개발 비화
    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3. 5. 22.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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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나다 출신으로 런던에서 의사와 대학 강의를 하던 밴팅은 의과대학도 같이 다녔던 단짝 친구가 당뇨병에 걸려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당뇨병의 치료법을 연구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당뇨병은 치료방법이 없었던 죽음의 병이었다. 밴팅은 개의 췌장에서 당뇨 치료 물질을 추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우여곡절 끝에 모교인 토론토대학의 생리학과 교수인 매클라우드의 실험실 사용 허가를 받았다. 원래 매클라우드 교수는 실험에 회의적이었으나 방학 때 빈 실험실에 한해 사용을 허가해 주었으며 의대생인 찰스 베스트를 조수로 붙여주었다. 밴팅과 베스트는 91마리째의 개 실험까지 실패했으나 기적적으로 92번째 개에서 추출을 성공했고 이 물질을 '아일레틴'이라는 이름으로 명명했는데 나중에 매클라우드가 제안한 '인슐린'으로 바뀌었다. 밴팅의 실험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지자 처음에 회의적이었던 매클라우드도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밴팅과 베스트가 분리한 물질을 이용한 임상시험이 시작될 때 물질의 순수도가 낮아 진행이 매끄럽지 않을 때 마침 토론토대학교에 와 있던 에드먼턴대학교의 제임스 콜립이 순수 분리를 도와주었고, 이후 베스트가 대량 생산에 성공한다.

    이들은 미국생물학회에 인슐린의 발견에 대해 논문을 작성하기로 했는데 시간이 촉박하고 논문 작성능력이 부족하여 초록 작성을 매클라우드에게 부탁했고, 이 과정에서 매클라우드의 이름이 논문에 올라가게 되었다. 당시 인슐린의 발견은 혁명적인 사건이라 발견 다음 해인 1923년 밴팅과 매클라우드가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이전부터 밴팅은 직접적인 인슐린 개발에 관여하지 않은 매클라우드가 자신도 인슐린의 발견자라고 지칭하는 것에 불만을 표시했다. 1921년 미국 생리학회에서 인슐린 발견에 대한 벤팅의 논문 발표때 매클라우드가 주로 답변하여 매스컴에서 매클라우드를 발견자로 인식한 적도 있었다. 특히 매클라우드보다 정작 실험에 더 많이 기여했고 대량생산에 성공한 베스트가 수상에 빠진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반면 매클라우드는 자신의 실험실에서 자신의 책임 하에 자신의 지원과 아이디어 제공으로 인슐린 발견에 성공했으며 밴팅이 실험능력이 없었을 때 기본 실험기법과 관련 논문을 전해 주고, 논문 작성에도 일조했기에 자신에게도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매클라우드가 노벨상을 받는 것은 당시 학계의 관행이기도 했다.

    결국 밴팅과 매클라우드의 분쟁이 계속되자 1922년 토론토에서는 밴팅과 매클라우드, 베스트에게 인슐린의 발견 과정에 대한 보고서 제출을 요구했다. 이후 대학은 매클라우드가 일부 공헌을 했다고 공식 입장을 정리했으며, 노벨상 선정위원회도 같은 결론을 내렸다. 밴팅은 노벨상 거부까지 고려했지만 당시 캐나다 국민들이 캐나다 최초 노벨상 수상에 엄청나게 들떠 있었기 때문에 거부하지 못하고 대신 상금의 반을 베스트에게 주었다. 그러자 매클라우드 역시 자신의 상금도 콜립에게 나눠주었다. 이렇듯 훌륭하고 우직한 성품을 가지고 있던 밴팅은 베스트와 함께 인슐린 제조 특허권을 토론토대학에 거의 무상(1달러 50센트)으로 넘겼고, 이후 1년도 지나지 않아 인슐린은 당뇨병의 표준 치료법으로 자리를 잡았다. 밴팅은 이후 1차 대전이 반발하자 군의관에 입대하였으며 2차 대전이 발발하자 '밴팅&베스트 연구소' 소장의 자리를 박차고 다시 자원입대했다가 사망했다. 이후 '밴팅&베스트 연구소'의 소장 자리는 찰스 베스트가 이어받았다. 밴팅은 캐나다 출신으로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이며 영웅적인 행동으로 캐나다에서는 뛰어난 위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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