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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3. 9. 1.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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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마니아의 독재자였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정권을 잡은 후 북한과 중국을 방문하면서 대대적인 숙청으로 독재체제를 구축한 김일성과 모택동의 행보에 감명을 받고 그 숙청수법을 루마니아에도 적용했다. 특히 북한을 많이 벤치마킹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국에 1천여 개의 도청 기구와 3백만 개의 도청기를 보급해 주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게 했다. 엄청난 수의 비밀경찰들이 활동하여 차우셰스쿠에 반대한 사람들을 정신병원에 강제입원시키거나 끔찍한 환경의 수용소에 보내버렸는데 당시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루마니아를 경찰국가라고 비판하였다. 주민들을 감시 통제하는데 비용을 너무 많이 들여 국고가 탕진되어 경제가 어려워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차우셰스쿠는 어릴 적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 지식이 매우 얕았다고 한다. 몇 장짜리 보고서도 제대로 읽지 못했으며, 그가 쓴 글들은 교정을 받아야만 했다. 심지어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다고 한다. 이러한 콤플렉스와 열등감 때문에 그는 더욱더 자신에 대한 우상화와 선전에 몰두했다. 북한의 주석궁전을 보고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 높이 85m, 길이 270m, 너비 240m짜리 자신의 초대형 집무실을 건설할 것을 지시했다. 700명의 설계가들이 설계에 달라붙은 이 인민궁전은 건물의 크기가 너무 커서 이곳을 방문한 방문객이 1시간 동안 전체 건물의 5%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또한 북한의 모란봉경기장에서 진행된 대집단체조를 보고 놀라 루마니아에도 이 같은 집단체조를 창작할 것을 지시했다. 본인과 아내의 생일을 국경일 지정했고 자신을 찬양하는 책을 매년 만들게 했다. 방송에서 부부의 이름이 몇 번 언급되어야 하는지 등도 검열받아야 했으며, 모든 신문의 1면은 항상 차우셰스쿠의 업적이 보도되어야 했고, 방송과 사진에 나오는 그 누구도 차우셰스쿠보다 키가 커서는 안 됐다.

    무리하게 공업화 정책을 폈다가 외채와 국가 재정 적자가 심해지자 거의 10년동안을 '수입은 하지 말고 수출만 할 것'을 강제하기도 했으며, 이로 인해 루마니아 국민들은 식량난과 생필품 부족에 허덕이게 되었다. 그 와중에도 자신의 일가를 위한 사치품들은 '특별 허가'를 받아 수입을 허용했다. 가족과 친척 40여 명을 정부 요직에 앉혔으며 루마니아에 거주하던 헝가리인의 토지 80%를 강제 몰수하기도 했다. 도시계획을 한답시고 기존 건축물들을 다 철거시키면서 역사적인 건축물들을 다 때려 부숴버렸는데 한 도시의 18%가 철거되어 역사상 평화시에 일어난 가장 큰 도시파괴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자신을 비판하는 전단이나 대자보가 타자기로 쓰여 있었다고 전국에 타자기 대여를 금지시키고 경찰의 증명서를 받게 했다. 놀랍게도 국민들이 당장 하루 먹을 음식이 없어 배를 곪을 때도 당시 국민들은 '차우셰스쿠가 이 사실을 알면 당장 쇠빗자루를 들고 와 가게 주인들을 때려잡을 텐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자신의 실책을 모두 아랫사람들에게 떠넘긴 그의 선전 때문이었다. 물론 당시 챠우셰스쿠는 매일 호화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그의 최악의 정책 중 하나가 바로 인구 증가 정책이다. 챠우셰스쿠는 인구를 늘린답시고 독신세는 물론 한 가정당 4자녀를 의무화하고 이를 어기면 금욕세까지 매겼다. 낙태와 피임, 이혼을 금지시켰으며 경찰을 이용하여 여자의 배란기 때에 부부가 같이 있었는지를 조사하여 같이 있지 않으면 세금을 물렸다. 부부의 정상적인 성관계 횟수를 주 3~4회로 규정했고 아이를 낳지 못하면 무거운 세금을 물렸는데 연봉의 20~30% 수준이었다. 이 세금은 장애인이나 불임인 여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견디다 못한 사람들이 인근 국가로 탈출을 감행하자 모조리 총살시키기도 했다. 강제 성관계 때문에 성병이 만연하게 된 부작용도 발생했다. 웃긴 건 고위 간부의 부인들은 강제 출산과 징세의 대상에서 제외되었으며, 실제 차우셰스쿠 부부도 자식이 셋밖에 없었다.

    그의 에너지 절약정책도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수도에서도 온수가 하루 2시간밖에 제공되지 않았으며 전기 공급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집에서 사용하는 전구 수도 제한했으며 일요일은 대중 교통이 전면 금지되었다. 농부들에게 '트랙터와 트럭을 쓰지 말고 육체노동을 해라'라는 운동이 벌어졌으며 세탁기 사용도 금지되었다. 석유 배급은 한 달 30리터로 제한했는데 하루 4시간 이상 난방을 한 사람은 구속대상이었다. 방송국도 통합시켜 버리고 유일하게 남은 방송국 방송시간도 제한했다. 정전 때문에 탄광에 있던 사람들이 긴 사다리를 통해 기어올라와야 했고, 환자 나이가 70세가 넘으면 구급차 사용이 금지되었다. 수술 중에 정전이 되어 수술이 중단되었으며 산소호흡기가 멎어 환자가 사망하거나 인큐베이터가 정전되어 수십 명의 아기가 사망하기도 했다. 주사 바늘 재활용 정책으로 감염병이 증가했다. 에너지가 끊임없이 공급되는 곳은 차우셰스쿠 일가의 저택과 그의 우상화를 위한 시설과 거리뿐이었다.

    그 와중에도 챠우세스쿠의 일가는 사치에 빠져 있었다. 전국에 40개가 넘는 호화 별장이 있었으며 아내 엘레나는 모피 코트만을 위한 방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수십 채의 외제차와 요트와 보트, 와인 저장고 등을 가지고 있었다. 사냥을 좋아해 수천 마리의 야생동물을 수입하고 사육해야 해서 드는 예산도 천정부지였다. 또한 수백 마리의 박제도 만들었다. 이런 그의 사치품들은 그가 총살당한 후 시민들에게 모두 털렸다.

    챠우셰스쿠의 아내 엘레나의 악행도 만만치 않았다. 기초적인 화학 지식이 없었는데도 독재자인 남편을 등에 업고 다른 학자들의 성과를 훔쳐 학위를 따고 저명한 화학자인 척했다. 남편의 우상화와 더불어 자신을 '성녀 엘레나', '인민의 자애로운 어머니' 세계에서 가장 정의로운 여성' 등으로 우상화했고 방송에서는 그녀를 찬양하는 방송을 내보내야 했다. 또한 히스테릭한 성격 때문에 주변 사람들을 엄청나게 괴롭혔다. 자기 맘에 안 든다고 고용인들을 괴롭혔으며 단 한 번도 자신이 찍힌 사진에 만족하지 못하고 사진사들을 닦달했다. 자신보다 예쁜 여성은 자신의 근처에 오지 못하게 했으며 엄청난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다. 외국 순방 때마다 엄청난 양의 뇌물을 요구했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했으며, 심지어 미국의 카터 대통령에게까지 막말을 일삼았다고 한다. 딸의 남자친구에게 막말을 퍼부운 건 예사고 심지어 살해를 지시하고 했으며, 아들의 여자친구가 마음에 안 든다고 병사들을 시켜서 그 여자를 집단성폭행시킨 후 그 사진을 아들의 책상에 올려놓은 적도 있다. "인민들은 마치 벌레와 같다. 아무리 먹여도 만족할 줄 모른다"는 망언을 남기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챠우셰스쿠의 유일한 장점이 아내보다 낫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며 지금도 루마니아 국민들의 증오를 받고 있다.

     


    이렇듯 루마니아는 감시와 통제, 인권탄압을 일삼고 우상화정책과 선전선동에 들어간 막대한 자금을 탕진해 경제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다 1980년대 말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동유럽 국가들의 공산체제가 붕괴되자 루마니아에서도 자유민주혁명이 발생하였고 결국 챠우셰스쿠는 아내 엘레나와 함께 총살당했다. 최악의 공산주의 독재자 중 한 명으로 24년간의 독재는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 스탈린의 대숙청, 폴 포트의 킬링필드, 김씨 일가의 독재와 함께 공산주의 독재의 악행 중 하나로 대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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