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루스벨트 대통령은 39세의 나이에 소아마비에 걸려 위기를 겪었으나 이후 피나는 재활로 공식석상에 서 있을 만큼 마비를 이겨냈고, 이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경우에는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으며, 소아마비의 고통은 평생을 루스벨트 대통령을 괴롭혔다.
소아마비(poliomyelitis)는 폴리오 바이러스에 의해 유발되는 질병으로, 바이러스가 신경계를 침범하여 발병한다. 심하면 사망할 수도 있고, 살아나더라도 척수마비로 인한 마비가 남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에게 많이 걸리기 때문에 소아마비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성인이 되어서 걸리는 경우도 있다. 1950년대에 미국에서는 어린아이들에게서 한 해 6만여 건의 소아마비 환자가 나왔으며, 이중 3천여 명은 사망, 2만여 명은 마비 후유증이 남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 국립소아마비재단을 설립하고 전국적인 모금 운동을 실시했다. 재단은 모금과 대통령의 지원을 바탕으로 미국 전역에 지부를 설립, 소아마비 환자들의 치료비 및 재활비를 부담하고 소아마비 백신 개발에 투자를 이어나갔다. 당시 재단에서 진행했던 후원 프로그램은 '10센트의 행진'이었는데, "우리 모두 10센트씩만 보내서 소아마비와 싸우는 대통령을 돕자"라는 운동이 큰 반향을 일으켜 전국에서 후원이 쇄도했다. (사람들이 실제 10센트만 후원하기도 했으나 많은 사람들이 그보다 더 많은 돈을 후원했다.) 결국 후원사업은 큰 성공을 거두어 후원으로만 750만 불(현재 가치로 6,630만 불에 해당)을 모금했다고 한다. 이후 이 '10센트의 행진'은 풀뿌리 운동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남았다.
당시 소아마비를 연구하던 사람 중에 조너스 소크 박사가 있었다. 그는 원래 변호사를 하고 싶어 했지만 어머니의 권유에 따라 의사로 진로를 잡고 뉴욕시립대 졸업 후 뉴욕의과대학에 진학했다. 뉴욕의과대학 시절 의사가 되기보다는 의학연구에 뜻을 두어서 졸업 후 피츠버그의과대학 연구실에 들어가서 거기서 소아마비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소크는 피츠버그 의과대학에서 약 7년간 휴일 없이 하루 16시간씩 연구에 매진한 끝에 효과적이고 안전한 소아마비 백신을 만들었다. 이는 20,000여명의 내과의와 공중보건 공무원, 64,000명의 학교직원, 220,000명의 자원봉사자가 참여한 초거대 프로젝트였다.
소크 박사의 백신은 사백신, 즉 병원체를 비활성처리 후 접종하는 방식으로 병원성이 없어 안전하고 면역력이 낮은 사람들에게도 투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주사를 통해 놓아야 하는 번거로움과 관리의 문제, 그리고 병원성이 약하기 때문에 여러 번 추가적인 접종이 필요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반면 소크 박사 외에도 소아마비 바이러스를 연구하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중 대표적인 사람이 알버트 세이빈 박사였다. 세이빈 박사는 이미 뎅기열과 일본 뇌염 백신을 개발한 경험이 있어서 당시 의학계에서 큰 명망이 있었는데, 세이빈 박사는 소크 박사의 사백신 방식 대신 생백신 방식으로 백신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생백신은 병원성을 줄인 살아 있는 병균을 직접 환자에게 투여하는 방식으로, 주사를 맡지 않고 입으로 먹으면 되는데, 이는 주사의 투여 및 관리가 쉽지 않은 경우 좋은 장점이었다. 또한 여러 번 주사를 맞을 필요 없이 단 한 번만 먹으면 된다는 엄청나게 큰 장점도 있었다. 다만 생백신은 면역력이 약한 사람이 먹을 경우 실제 그 질병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단점도 있었다.
당시 미국 의학계에서는 세이빈 박사의 생백신을 지지했고, 대조적으로 소코 박사의 사백신을 배척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세이빈 박사는 소크 박사의 연구에 대해 '그정도면 아무나 부엌에 들어가서 할 수 있다.'라고 비아냥대었고, 소크 박사가 백신에 대한 특허를 받지 않겠다고 했을 때 소크 박사를 비난하던 사람들은 '어차피 그 기술 자체가 너무 평이하기 때문에 특허를 받을 수도 없었을 거다.'라고 했었다. 세이빈 박사는 "I developed THE vaccine, not A vaccine."라는 말도 했다. (이건 번역하기가 영....) (그러나 세이빈 박사 역시 자신이 만든 생백신에 대해 특허를 신청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이빈 박사가 생백신에 대한 연구를 진행할 당시 소크 박사의 사백신은 이미 개발이 상당히 진척되어서 거의 상품화 할 수 있는 단계까지 진행되어 있었고, 사백신의 특성상 백신을 맞은 후 소아마비가 발병될 우려가 없다는 이유 때문에 소아마비재단에서는 소크 박사에게 연구비를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루스벨트 대통령의 서거 10주기인 1955년 4월 12일, 소아마비 백신의 완성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열게 되었다.
소크 박사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연구 결과에 대한 특허권을 행사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데 그의 유명한 "태양에도 특허를 낼 껀가요?(Could you patent the sun?)"는 그때 나온 말이다. 이게 얼마나 대인배적인 행보인가 하면, 만일 소크 박사가 그 특허권을 행사했다면 얼마나 벌었을까를 계산한 적이 있었는데, 약 70억 달러, 한화로 약 8조 원을 벌었을 것이라는 계산이 나왔다고 한다. 실제로도 그의 백신 개발 소식이 발표되자 수많은 제약회사들이 특허를 양도하라는 제안을 보냈었다고 하는데 소크 박사는 '내가 일해서 버는 돈으로 사는데 지장 없다.' 라며 소아마비 백신의 특허를 풀어버렸다.
그럼 세이빈 박사의 생백신은 어떻게 되었나? 세계 최초로 소아마비 백신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지만 세이빈 박사는 연구를 계속했고, 1956년 백신에 대한 임상실험을 마쳤으나 이미 소크 박사의 사백신이 성공적으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 내에서 사용을 허가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의외의 곳에서 세이빈 박사의 백신이 사용되게 되었으니, 바로 소련이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소련 역시 냉전의 당사자인 미국에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큰 문제였다. 세이빈 박사는 소련에서 1956년부터 1961년까지 소련과 동유럽 등 동구권을 주축으로 대규모 실험을 했고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어 내었다. 특히 세이빈 박사의 생백신의 '주사를 놓지 않고 먹으면 된다.', '보관 및 관리가 용이하다.', '한번만 먹으면 된다.'라는 장점이 당시 낙후되었던 소련과 동구권의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또한 공산주의 독재진영의 특성상 백신을 먹고 백신으로 인해 병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문제는 정부에서 관리가 가능한 상황이었고, 경구 투여된 생백신이 인간의 분변을 통해 체내로 배출된 후 상하수도를 통해 사회로 퍼지게 되어 모든 사람들이 소아마비 항체를 가지게 되는 근분적인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진다는 장점도 있었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소아마비는 사백신보다는 생백신이 더 인정을 받게 되고 이후 세계적인 표준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소아마비가 거의 근절되었고, 우려했던 대로 생백신에 의한 소아마비 감염이 실제로 발생하면서 미국에서는 다시 사백신을 사용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생백신 역시 사용을 제한하지는 않고 급성 소아마비가 발생하거나 주사를 맞지 못하는 경우에는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하여간 이러한 소크 박사와 세이빈 박사의 선의의 경쟁은 세계 의학계에 큰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고, 소크의 사백신과 세이빈의 생백신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전세계의 수많은 아이들의 생명을 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현대에 와서 백신 맞지 말자는 정신 나간 엄마들이 생겨나고 있어서 큰 문제다. 이들의 문제는 자신의 생명이 아닌 자신의 아이의 생명을 담보로 한다는 점, 그리고 사회가 기껏 이루어 놓은 면역 안전망의 구멍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세이빈 박사는 이후 미주연합과 세계보건기구에 의해 운영되는 전세계 예방접종 프로그램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지만, 당시 의학계에서 배척받던 소크 박사는 끝내 의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소크 박사는 세이빈 박사와는 다르게 미국 과학학술원 회원에도 선정되지 못했고, 의학계에서 주는 상은 하나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정부와 대중으로부터 큰 지지와 성원을 받았으며 소크 생물학 연구소를 설립, 암과 다발성 경화장, 자가면역질환 등을 연구하였고 소크 박사는 1995년 에이즈를 위한 백신 개발 중 심장마비로 81세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그리고 당시 의학계의 무시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가 기억하는 소아마비 정복의 대명사는 소크 백신과 소크 박사이다.
여담으로 소크 박사는 소아마비 백신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지 말고 피츠버그 백신으로 불러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영웅을 만들어 내길 원했던 언론들은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다르게 계속해서 '소크 백신'이라는 이름을 썼다고 한다. 여담 하나 더 소크 박사는 그 업적에도 불구하고 노벨상을 받지 못했는데(세이빈 박사도 마찬가지), 이에는 여러 가설이 있다. 하나는 이미 소아마비의 원인인 폴리오바이러스의 배양법의 발견으로 노벨상이 이미 수여되었기 때문에 주지 않았다는 설, 또 하나는 소크 박사와 세이빈 박사, 그리고 그 지지자들 간의 싸움이 워낙 심해서 아예 둘한테 다 상을 주지 않기로 했다는 설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