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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때 억울하게 죽은 신각. 그리고 김명원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4. 1. 24. 00:20300x250
신각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임진왜란 발생 시 도원수 김명원 휘하의 부원수로 한강 방어에 실패하고 양주로 후퇴한 후 유도대장 이양원, 함경도 병마절도사 이혼과 합류하여 양주 해유령 근처에서 왜군 소부대를 기습 70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는 임진왜란 중 최초의 육지 전투 승리였다. 그러나 당시 파천으로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김명원과 신각이 연락이 끊어진 상황에서 '신각이 이양원을 따라간다는 핑계로 도망쳤으니 국법으로 다스려 주시옵소서'라는 장계를 올렸고 당시 조정에서는 많은 장수들이 도망가고 있는 상황에서 본보기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기에 신각에 대한 처형을 결정해 버렸다.
이후 해우령 전투에 대한 승전보가 조정에 도착하여 조정에서는 신각에 대한 처형을 중지하라며 선전관을 파견하나 선전관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신각이 처형된 후였다. 조정이나 김명원 입장에서 보면 당시 도망간 장수들이 너무 많아서 일벌백계를 해야 할 상황이었고, 급박한 전시 상황에서 파발과 봉화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였고, 신각이 승전에 대한 전투 보고서인 첩서를 늦게 보낸 점 등이 꼬이고 꼬여서 최악의 결과가 나오게 된 것이다.
김명원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 와중에 도원수직을 맡았으나 전투에 서투르고 군 병력 통제에는 실패했다. 사관도 '사람됨이 너무 유순해서 장수감은 아니었다' 고 적었을 정도. 실제 전투에서는 그다지 활약하지 못하였으나 평양성 전투 때 평북 지역에서 2만에 달하는 군사를 양성하고, 한양 탈환시에는 경기도 일대에서 수천의 병사를 징발하는 등 군사 행정에선 매우 탁월했다고 하며 전쟁 후반부에는 류성룡, 이항복 등과 함께 병력 배치화 행정을 담당했으며 명나라 장수들의 고문 역도 맡았다고 한다.전쟁 초기 신각의 억울한 처형과 관련하여 대표적인 흑역사가 생겼는데 여러 정황상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보는 견해가 많으며 류성룡도 징비록에서 신각의 죽음은 안타깝게 생각했지만 김명원을 비난하지는 않았다. 하여간 이 일에 대한 반면교사였는지 이순신 탄핵 당시 선조의 서슬 퍼런 분노에 이순신의 친구인 류성룡까지 깨갱하고 있던 와중에 정탁, 이원익과 함께 중립을 지켰다. 이항복과는 당파가 달랐었지만 업무상 호흡은 좋았다고 하며 칠천량 해전 패배 후 이순신 복귀를 같이 건의하기도 했고, 나중에 이항복이 영의정에 오를 때 같이 좌의정까지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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