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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0대까지 한량처럼 보냈던 명장 권율
    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4. 2. 26.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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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율의 집안은 조선 개국공신인 권근이 6대조이고 아버지 권철은 영의정을 역임한 뼈대 있는 집안 출신이다. (참고로 권철은 오성과 한음의 감나무 일화에 나오는 옆집 대감님이다. 이항복의 비범함을 어여삐 여겨 자신의 손주사위로 삼았다고 한다.) 권철의 막내아들이었던 권율은 나이 40이 되도록 관직에 나서지 않고 지인과 어울려 전국을 여행하거나 지리를 연구하는 등 한량처럼 지내다 아버지의 사망 이후 과거 공부를 시작, 선조 15년인 1582년 그의 나이 46세 때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 정자가 되었다. (사위 이항복보다 급제가 2년이나 늦었다)

    집안 덕을 보았는지 승진이 빨라 의주 목사까지 되었는데 베이징에 갔던 역관들의 유언비어로 해직되었다고 한다. 이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래도 이 사람이 능력이 있다'는 주변의 간언이 있어서 선조로부터 광주목사에 제수된 후, 함락된 수도 탈환을 위한 북진에 참여하여 금산군 이치 전투와 수원 독선산성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치 전투의 공으로 전라감사에 제수되었으며 수도 탈환을 위해 행주산성에 수천의 군대로 진지를 구축한 후, 끈질기게 공격해 온 3만의 왜군을 물리치고 승리했으니 이게 바로 행주대첩이었다. 이후 실질적인 도원수로 육군 총사령관 위치에서 군무를 총괄했으며, 전란 중에 기력을 소진한 탓인지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7월에 사망하였으니 그의 나이 63살이었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류성룡이 이순신과 함께 천거한 사람이 권율이라고 하며, 임진왜란중에 업무상 견해차로 인한 마찰은 있었지만 서로 인정하고 협조하는 관계였다. 이순신이 백의종군할 때 무밭을 가꾸게 하는 등 여러 면에서 편의를 봐주기도 했다. 반면 원균과는 매우 사이가 나빠서 권율이 이순신을 모함하기 위해 조정을 기망하자 면전에서 욕을 하며 곤장을 친 일도 있었다. 이후 원균의 후손이 방송에 나와 칠천량 해전 패전의 책임은 원균이 아니라 권율과 조정 탓이라는 망언을 해서 큰 비판을 받기도 했다.

    기록에 따르면 키가 8척이나 되어 풍채가 컸고 엄중한 안색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고 괴짜인 면모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공무를 봄에 있어 매사에 신중하고 항상 만전을 기하는 성품이었으며 공사 구분도 매우 엄격했다고 한다. 문신 집안 출신이지만 전투에서 상당히 대범하고 기동력 있는 병력 운용을 했다고 평가받으며 주위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는 명석함도 보여주었다. 상당히 대범한 성품으로도 유명한데 전투 중에 떨어진 지휘봉을 찾으려고 일본군 진영에 태연히 돌입해서 주워왔다는 야사도 있으며, 일본군 지휘관에게 거짓으로 '낮의 전투 중에 내 말채찍을 떨어뜨렸으니 찾아달라'라고 하여 일본군 병사들이 없는 말채찍을 찾기 위해 전장을 뒤지게 하여 일본군의 사기를 떨어뜨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반면 행주대첩 이후 일본군에 대한 분노로 죽은 왜병들이 시체를 찢어서 나뭇가지에 걸어놓을 정도로 분노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고 한다.

    사위인 이항복과는 거의 친구나 형제처럼 서로 농담따먹기를 하면서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사위 이항복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자신의 공 중 3천의 병력으로 3만의 일본군을 막은 행주대첩보다 결과적으로 일본군의 진격을 막아 호남 지역을 지킬 수 있었던 교두보를 마련한 웅치와 이치 전투를 더 가치 있게 생각했다고 한다. 전투의 성과보다 전쟁 전체를 보는 관점에서 본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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