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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린이날의 창시자 소파 방정환 선생
    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4. 5. 11.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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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정환(1899~1931). 서울 출신으로 아버지가 야주개 시장에서 쌀과 생선을 팔던 상인이었어서 어렸을 때 남부럽지 않은 풍족한 생활을 했지만 이후 가세가 기울어져 선린상업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조선총독부의 필경사로 취직했다. 그러나 이후 친분이 있던 민족운동가 권병덕이 일본인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그만두라 충고하였고 이에 따랐다. 이후 권병덕의 소개로 천도교 교주 손병희와 만나게 된 후 천도교 본부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를 눈여겨본 손병희는 이후 그의 셋째 딸과 방정환을 혼인하게 했다). 3.1 운동 때 등사기를 구해서 만세 운동 관련 기사와 독립선언문을 인쇄해서 사람들에게 배포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일주일 동안 고문을 받고 풀려났다. 이후 일본에 대해 더 잘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일본으로 유학, 1920년 도요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여 아동예술과 아동심리학을 연구했다. 이후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소년운동을 전개했다. 1922년 처음으로 어린이의 날을 제정하고, 1923년에는 최초의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했다.

    그 이전까지 어린이는 종래의 유교도덕에 얽매어 있었다. 방정환은 이에 반기를 들고 어린이들은 어린이 다운 감성으로 해방시키고자 하였다.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최초의 아동문화운동가이자 사회운동가였으며, 번안 및 개작, 창작 등을 통해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 제작과 편찬에도 힘썼다. 유학 중에 '개벽'잡지가 창간되자 도쿄 특파원으로 활약하면서 안데르센 동화나 그림동화, 아라비안나이트 등을 번역한 세례명작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1922년 발행했다. 여기에는 '산드룡의 유리구두'라고 번역된 신데렐라 이야기도 실려 있었다. 그밖에 여러 필명으로 많은 동화를 만들었다. 그때까지 부정적 의미로 쓰이던 '어린이'를 '늙은이'나 '젊은이'와 대등하게 격상시켜 그 이정까지 '아들놈', '딸년', '애새X'로 불리던 아이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인식시킨 것도 그의 공이다.

    원래 방정환 선생이 처음 제정한 어린이의 날은 처음에 5월 1일이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어린이날 행사가 금지되기도 하는 등 많은 탄압과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나, 1949년부터 5월 5일로 공식적으로 제정되었고 1975년부터는 법정공휴일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활동은 일제의 방해를 받았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어린이를 위한 그의 활동이 일종의 독립운동이라고 의심했는데, 어린이들에게 한국인으로서의 민족의식을 기르게 하고 나아가 자주독립정신을 일께워려는 그의 뜻이 좋게 보일 리 만무했다. 일제는 어린이 잡지를 철저하게 검열해서 원고가 삭제되기 일쑤였고 검열 때문에 발행일자를 못 지키는 것도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방정환 선생은 독자 초청 행사를 만들어 편집일이 없는 날엔 밖으로 나가 정기적으로 등사기를 이용한 동화 구연을 하였는데 많을 때는 그의 동화 구연을 보러 천여 명의 관중이 모이기도 했다고 한다. 방정환 선생을 최초의 동화구연작가라고 칭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하지만 방정환 선생의 인생은 그 뜻을 펼치기에 너무 짧았다. 방정환 선생은 자신을 돌보지 않은 채 활동하여 건강을 잃었고, 일제의 가중된 탄압, 재정난, 소년운동 진영의 분열이 가져온 심리적 부담으로 쓰러졌고 결국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1931년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평상시 단 음식을 매우 좋아했는데 그 영향도 있었다고 한다. 죽기 전까지도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 집필에 몰두했다고 하며 그의 유언은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였다고 한다. 이후 1957년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소파상'이 제정되었고, 1971년 40주기를 맞아 서울 남산공원에 동상이 세워졌는데 1987년 서울어린이대공원으로 이전했다. 이후 1978년 금관문화훈장,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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