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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의 대 중국 사신 외교
    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4. 7. 27.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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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에서 중국에 보내는 사신은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조선 전기에는 명나라에 보내는 사신을 신을 ' 조천사(朝天使)'라 했으며, 조선 후기에는 청나라의 도읍인 연경(燕京: 北京)에 간 사신이란 의미로 '연행사(燕行使)'라 했다. 기본적으로 해마다 정례행사로 4번의 사신을 파견했고 그 외에도 수시로 임시사행을 파견했다. 기본적으로 조선의 대 중국 외교 스탠스는 대중국 관계를 사대(事大)라 하여 주종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반면 일본과의 관계는 교린(交隣)이라 하였다) 명나라는 중국의 정통 왕조라고 생각했지만 청나라는 정복왕조라 간주, 어쩔 수 없이 주종적은 사대 관계를 맺은 것이지 자의적인 교섭은 아니다고 생각했다. 명에 보내는 사신은 조천사라 하지만 청때는 연행사라 이름을 달리 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한 번 사신이 갈 때마다 가는 인원도 많았다. 기본적으로 정사, 부사에 여행 기간동안 보고 들은 각종 외교 정보를 적어 국왕에게 보고하고 사행단의 비리나 부정을 감찰하는 서장관, 통역 업무를 담당하는 대통관(통사), 예물이나 기타 물건을 나르는 압물관, 의원, 화원, 말을 관리하는 압마관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정관의 수행원을 합치면 200~300명의 대규모 인원이었다. 이는 육로 기준이고 배로 갈 때는 3~40명으로 인원이 대폭 축소되었다. 사행원을 선발하는 것도 조정의 중요한 업무였다. 보통 출발보다 3~4개월 전에 임명하였다고 한다.

    가는 길이 워낙 먼 길이다보니 위험도 속출했다. 육로로 가는 것도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고 바닷길로 가는 것도 풍랑을 잘못 만나면 수장될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조선 중기 문신인 안경은 해로를 통해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연행을 갔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후손들이 자신처럼 목숨을 걸어야 하는 연행을 가게 될 까봐 "후손에게 문과급제를 시키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고 한다.

    비록 약자의 입장에서 중국에 조공을 바치긴 했지만 무턱대고 저자세를 취하지만은 않았다. 연경에서 우리 자존심을 꺾고 굽실거린 관리들은 귀국하자마자 처벌을 받기도 했다. 반면 경종이 세자가 됐을 때 적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청나라 황제의 윤허를 받지 못한 사신들은 삭탈관직에 처해지고 한양 밖으로 쫓겨나는 일도 있었다.

    연행에 갔다 온 사신들은 자신들의 경험담을 연행록으로 남겼다. 대표적인 연행록은 박지원의 열하일기이다. 중국 관리들이 중요 자료를 보여주지 않거나 어디에 들여보내지 않을 경우 조선에서 가져간 우황청심환 한두 알을 슬쩍 건네주면 다 해결되는 '우황청심환 외교'의 사례도 있었고, 북경에 온 조선 사신들이 법장사 백탑에 너도나도 '나 여기 갔다 왔다'라고 낙서를 해 놓은 통에 19세기에 이르러 탑에 조선 사람 이름이 가득 차 더 이상 이름을 쓰기 힘들었다는 낯부끄러운 일화도 있다. 또한 세계정세에 무지한 조선 지도자들에게 국제 정세에 밝았던 역관들이 신분의 한계로 목소리를 내지 못한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현재 발굴된 연행록은 수백 권에 달하며, 현재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조선과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송·원·명·청 등 700여년 동안 여러 왕조와 교류기록을 남긴 연행록을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에 등재시키기 위한 준비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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