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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시대의 불교정책
    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5. 1. 24.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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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초기의 왕들은 불교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불교 사찰의 재산을 국가에 환수하는 반면 왕실의 불사나 개인적 신앙에는 열심인 경우가 많았다. 태조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대부 신하들의 억불책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상왕이 된 후에도 태종의 불교 억제책에 반발하기도 했다.

    전국의 유교 사찰은 242개만 남겨놓고 그 외 모든 사찰의 토지와 노비를 환수하는 역불 정책을 대대적으로 시킨 태종도 왕실에 우환이 있을 때는 궁궐에서 불사를 열었고, 태조나 왕비가 위독했을 때는 직접 불공을 올리기도 했다. 세종 역시 초기엔 불교 억제 정책을 강화하였으나 말기에는 불교에 대한 숭배가 과도하여 신하들이 반발을 하기도 했다. 세조는 대군 시절부터 많은 불사를 주관 하였으며 왕위에 오른 후에도 불경을 간행하고 팔만대장경을 인쇄하여 각 도의 명산대찰에 소장하게 했다. 왕세자가 병으로 죽자 친히 불경을 사경하기도 했다.

    이렇듯 조선 초기의 왕들의 불교에 대한 관점은 국가의 통치에서는 불교의 기능을 배척하였지만 종교적 성격과 기능성은 인정하여 불교가 정치의 영역으로 넘어오지 않는 한 불교 본래의 자비정신과 부처의 권능은 이해했다고 정리해 볼 수 있다.

    이후 조선시대가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사대부층에 의해 자리를 잡으면서 불교는 주류 사회에서 배제되었다. 이는 고려 말기 불교가 정치에 깊숙히 관여하여 부를 독점하고 도덕적 해이가 만연했던 것이 이성계와 신진 사대부가 새로운 왕조를 만든 계기 중 하나였다는 근본적인 원인도 한몫했다. 성리학에 기반한 조선 정부와 유학자들은 불교를 이단으로 취급했다. 유학자들이 불상의 목을 따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며, 억불을 넘어 연산군과 중종 시절에는 폐불이 단행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명종때에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문정왕후의 영향으로 일시적으로 양종과 승과가 재개된 적도 있었으며, 무엇보다 임진왜란 때 의승군을 일으켜 국가의 위기 극복에 큰 공적을 쌓은 후 불교는 사회적 효용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사명대사와 서산대사라는 걸출한 인물이 두각을 드러낸 것도 이때였다. 한편 원나라가 망하고 한족인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가 중화의 정통이 되면서 주자학의 화의론적 정통 인식에 들어맞자 조선의 유학자들이 더 이상 불교를 무턱대고 '오랑캐의 종교'라며 깔보고 배척할 수도 없게 되었다. 이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도 승병과 의승군이 조직되어 전투를 벌였고 전후 복구사업에도 투입되는 등 사회적 효용성도 인정되었다.

    불교의 종교적인 역할 역시 사라지지 않았다. 윤회나 인과응보 등 불교의 기본 개념은 백성들의 전통적인 사상으로 자리잡았으며, 내세의 명복을 빌고 극락왕토에 왕생하기를 기원하며, 현실의 재액을 피하고 복을 추구하며 후세의 번성을 바라는 신앙 형태가 관습 되면서 민간 신앙의 위치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불교가 제세안민과 복민우세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확인되면서 영정조 때에는 공식적으로 불교가 재평가되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천주교가 넘어와서 세를 넓히자 조정에서 이를 경계하고 탄압하기 시작하면서 불교는 오히려 더이상 이단으로 몰리지 않고 인정과 방임의 대상이 되었다. 동학이 득세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19세기에 급격한 변혁과 국제 관계상 변화의 시기에서 서양의 문물들이 쏟아져 들어오게 되자 오히려 불교는 조선의 전통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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