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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구 암살범 안두희를 때려죽인 박기서
    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5. 8. 20.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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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 선생의 암살범인 안두희는 대지주 집안이었으며 본인도 메이지대학 법대에 입학했었다. 김구 선생을 암살한 이후 무기징역을 받았으나 곧바로 15년형으로 감형되고 6.25 전쟁이 발발하자 풀려나 군인으로 복무하고 1953년 완전히 복권된다. 6.25 이후 군 납품업을 하면서 큰돈을 벌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백범의 원한을 갚겠다는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공격받거나 납치당하는 등 해서 잠적생활을 하기도 했다. 곽태영에게 칼을 맞거나 권중희가 휘두른 정의봉에 갈비뼈와 머리가 깨지기도 했으며, 노송구에게 각목으로 맞기도 했다. 권중희는 이후 안두희를 납치하기도 하는 등 평생에 걸쳐 안두희를 쫓았다. 

     

    그러다가 1996년 박기서의 정의봉에 맞아서 피살되었는데 그의 나이 79세였다. 박기서는 '백범일지'와 권중희가 쓴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를 읽고 안두희를 살해할 결심을 했다고 한다. 안두희를 때려죽인 박기서는 이후 성당에 가서 고해성사를 하고 신부의 권유에 따라 경찰에 자수했다. 안두희는 "국부를 시해한 자가 세 치 혀를 놀리며 천수를 다하는 것을 그냥 놔둘 수 없었다. 인간쓰레기를 치우는 청소부의 심정으로 처단했다."라고 밝혔다.

     

    구속된 박기서를 위해 사회 각계 인사 9천여명이 '박기서 석방대책위원회'를 꾸렸다. 1심에서 당시 살인죄 최소 형량인 5년형을 선고받았으며, 2심에서는 징역 3년으로 감형되었고 대법원에서 최종 징역 3년형이 확정되었다. 이후 1년 6개월여 복역하다가 1998년 대통령 3.1절 특사로 석방되었다. 

     

    감옥생활 중에 많은 국민들이 위로와 격려 편지를 보내주었다고 하며, 집도 제공받았다. 사건 전에 일하던 버스회사에서는 박기서가 출소하자마자 바로 복직시켜 주었으며, 이후 개인택시 면허를 취득하여 택시기사로 근무하였다. 그가 잡혔을 때 형사들도 그를 수갑 채우지 않고 그냥 연행했다고 하며, 범행에 쓴 정의봉도 살인에 사용한 도구는 몰수 후 폐기한다는 원칙을 깨고 박기서에게 돌려주었다. 박기서는 이후 이 정의봉을 민족문제연구소가 개관한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사건 이후 박기서는 운전기사로 재직하며 여러 곳의 초청을 받았지만 유일하게 민족문제연구소에만 가입했다. 이후 백범 선생과 윤봉길 의사의 묘와 안중근 의사의 가묘 등 독립운동가 8인의 묘가 조성되어 있는 효창공원 위상 찾기 운동에 참여해 효창공원이 국가가 관리하는 공원으로 격상해 줄 것을 요청했고 국가보훈처에서는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효창공원에 '독립운동기념공원'을 조성했다. 

     

    이후 친일반민족행위 옹호 발언으로 유명한 김완섭을 폭행하기도 했다. 당시 김완섭은 "박기서는 안두희 살해범 박기서가 아니라, 나 김완섭 구타범 박기서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라고 했지만 그의 뜻대로 되진 않았다. 2023년엔 육사 독립유공자 흉상 철거 논란과 관련해서 강력하게 비판하기도 했으며, 2025년 6월 대통령 취임식에도 참석하는 등 건강했으나 갑작스럽게 건강이 나빠져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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