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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한 최만리의 주장은 타당한가?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6. 3. 8. 00:10300x250

최만리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강원도관찰사와 집현전 부제학 등을 역임하는 등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유학 실무자이다. 특히 그는 조선왕조 전체를 통틀어 217명밖에 인정받지 못한 청백리 중 으뜸으로 청렴하고 올곧은 관료였다.
하지만 최만리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 및 반포에 반대하여 1444년 정창손, 하위지 등과 함께 상소를 올렸다. 이를 '갑자상소문'이라고 하는데, 최만리는 훈민정음에 대해 아래와 같은 이유로 반대했다.
- 중국의 한자와 방식이 다르다.
- 새로운 문자를 만드는 것은 일본, 여진, 몽골, 티베트 같은 오랑캐나 하는 일이다.
- 원래 존재하던 이두는 조악하기는 하나 한자를 배우는 데도 도움이 된다. 하지만 한자와 관련이 더 적은 한글을 쓴다면 한자를 아는 자가 적어질 것이다.
- 훈민정음을 반포하면 형사(刑事)에 있어서 억울함을 해결할 수 있다고 하나, 이는 재판이 공정해야 해결되지 훈민정음과 관계없는 문제이다.
- 논의도 없이 갑작스럽게 글자를 만들고 운서를 고치는 것은 옳지 못하다.
- 동궁(세자)이 해야 할 다른 일이 많은데 훈민정음 창제에 너무 관여하고 있다.
또한 최만리는 성리학의 나라에서 한글이 퍼져서 사용하게 되면 한자가 도태되고, 이렇게 되면 유학 경전의 원문을 이해하지 못해 포기하거나 공부를 하려 해도 원문을 모르면 제대로 익히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조선 중후기에 가면 '요새 공부 안 하는 선비 놈들은 언문만 알지 한자를 제대로 몰라서 경전 해석도 제대로 못한다'라며 비판하는 사례가 나오기도 했다. 세종 역시 최만리의 주장에 마땅한 반박 논리가 마땅찮아 '너희가 음서를 아느냐?' 라며 권위에 호소하는 논리적 오류를 보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최만리의 주장은 합리적인 것일까?
사실 최만리의 주장이 나름 합리적인 지적으로 보이지만, 다르게 보면 전적으로 기득권인 당시 사대부 입장을 대변하며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마인드가 너무 뿌리깊게 박혀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다르게 본다면 '기득권의 지식 독점'을 유지하려는 보수적 방어 기제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먼저 최만리가 '이두를 쓰면 되는데 굳이?' 라고 했지만 이두는 불완전한 기록체계로 한계가 명확했다. 한자를 알면 쓸 수 있다는 장점은 반대로 한자를 알아야 쓸 수 있다는 난이도의 원인이 된다. 조선 말기까지 관공서에서야 쓰였지만 일반인에게로 퍼지지 못한 것은 그래서이다. 이와 관해서 세종 역시 "너네는 설총의 이두가 옳다고 하면서 왜 이두보다 쉽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새 글자는 불가하다 하냐?"라고 반박했다.
그리고 최만리는 한글을 따로 만들면 중국에서 싫어할꺼다라는 중화사상에 기반한 주장을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글 창제의 목적 중에는 앞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더 열심히 하고 교류를 활발하게 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당시 중국어 통역관을 키우기 위해 중국어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중국 운학에 대해 연구했는데 이 운학이 한글 창제의 기틀이 되었다.
송사 관련 얘기는 사실 세종이나 최만리 모두 찬성을 위한 찬성, 반대를 위한 반대 건수로 끼워 넣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실제 당사자인 백성들 입장에서는 다르게 다가왔을 수도 있었을 수 있다. 그리고 최만리 주장이 맞는 것 같아 보이지만 오늘날로 치면 '어차피 법무사나 변호사, 회계사 쓰면 다 알아서 해주는데 고등학생들에게 수능에도 안 나올 거 굳이 가르칠 필요 있냐?'는 이야기 같은 거라고 볼 수 있다.
한자가 도태되면 유학 경전의 원문을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개념 또한 전형적인 엘리트주의적 시각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한자는 단순한 글자가 아니라 유교적 가치와 문명을 담는 그릇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지만 글자는 진리를 전달하는 그릇일 뿐 진리 그 자체가 아니다. 유학의 핵심은 문자 자체가 아니라 도덕과 사상, 척학적 이해인데 최만리의 주장은 도구적 관점에서 수단과 목적의 분리를 의도적으로 뭉갠 주장이다.
그리고 최만리의 주장과는 다르게 애초에 세종이 만든 훈민정음의 기본 취지는 "한자를 대체한다.", "한자를 버린다." 가 아니라 한문을 기본으로 한 보조 문자의 개념이었고, 오히려 학문 접근성을 넓히는 도구였으며 유학의 이상과도 양립이 가능했다. 실제로 훈민정음이 반포되었지만 한자는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계속 사용되었고 과거제도도 유지되었으며 유학은 오히려 더 체계화되었다.
마지막으로 한글 창제의 기본 목적 자체가 성리학의 기본 이념에 따른 것이다. 성리학에서는 바른 정치는 바른 소리, 즉 정음(正音)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이는 올바른 소리를 모르고서는 성인지도를 제대로 따를 수 없다는 사상임. 또한 '백성을 교화한다'는 유학의 이상인데, 문자가 너무 어려워 백성이 배울 수 없다면 이는 유학의 이상과도 모순되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훈민정음은 유학 정신을 훼손하기보다 오히려 실천에 가깝게 만드는 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훈민정음 발매 후에도 여러 가지 사정, 특히 사대부들의 멸시와 견제로 개화기까지 언문은 그렇게까지 일반 백성들에게 널리 퍼지지 못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사대부들의 국민 개돼지 만들기 작전이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고 벌 수도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훈민정음 창제의 위엄이 훼손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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