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설탕을 대중화시켰지만 불행한 인생을 살았던 과학자
    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2. 8. 22. 11:38
    300x250

    300년 전까지만 해도 유럽 귀족의 사치품이었던 설탕은 당시에는 유일한 생산 작물인 사탕수수가 아열대기후에서만 자라는 식물이라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음. 그러다가 독일의 화학자 마르그라프가 현미경으로 사탕무(당시 사탕무는 온대나 냉대 기후에도 잘 자랐지만 가축 사료나 빈민들이 먹는 작물이었음) 조각을 보다가 사탕무에 당 성분이 있는 것을 발견함. 이후 여러 사람들이 사탕무에서 설탕을 추출할 수 없을까 도전했지만 실패했고 마르그라프의 제자인 프란츠 카를 아샤드가 도전하여 1801년 성공함. 그러나 그의 공장은 나폴레옹 전쟁에 휩쓸려 잿더미가 되었는데, 당시 아이티가 독립을 선언하고 대륙봉쇄령으로 사탕수수 수입이 막힌 상황에서 나폴레옹이 사탕무를 이용한 설탕 제조법을 요청하자 “모든 인간은 천국을 느낄 권리가 있다.”라며 제조법을 프로이센과 프랑스에 무료로 풀어버림. 이 때 영국의 설탕 상인들은 그의 실험이 실패했다고 선언해 달라며 200,000탈러를 제안하였으나 거절함.



    [부연설명] 사탕무를 정제한 설탕이 퍼지게 되면서 더이상 설탕은 사치품이 아니게 되었음. 현재 사탕무는 전 세계 설탕 수요의 20%를 차지하고 있으며 지금도 유럽과 러시아에서 사탕무를 많이 생산하고 있음. 하지만 아샤드의 말년은 그리 순탄하지 못했음. 이후 그의 정제공장이 몇 차례 화재를 겪고 다른 사탕무 정제공장이 여러개 생기면서 재정적 어려움에 빠져 1815년 파산하였고 궁핍하게 생활하다 1821년 사망함. 이후 그의 손자가 미국 미시간에서 사탕무 공장을 지었다고 함.

    300x250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