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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가 감싸돌았던 원균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2. 9. 20. 23:49300x250
원균의 아버지가 경상도 병마절도사 원준량의 아들인데 원중량이 자식을 부정입시케 하여 탄핵받은 적이 있는데 그게 원균이라는 얘기가 있다. 원중량 자식 중에 나이 맞는 자식이 원균밖에 없다고. 사실 원균이 고공승진을 기록하자 원균 집안에서 "쟤가 저럴 능력이 없는 애인데..." 라며 걱정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여간 임진왜란이 다 끝난 후 선무공신 1등에 봉해졌으나 권율이나 이순신의 경우 정1품 품계를 받은 데 비해 원균은 종1품의 품계만 받았다. 권율과 이순신이 각각 영의정과 좌의정 및 부원군의 작호가 추종되었으나 원균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군의 작호가 추종된 것이다. 이를 미루어 볼 때 조정 내에서도 원균의 평가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선조의 고집으로 선무공신 1등급은 되었지만 그 이상은 바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후일 선조를 비난하는 측은 선조 본인이 직접 발탁하고 본인의 명에 따라 본인이 시키는 대로 하다가 전사했기 때문에 선조 본인의 과오를 희석하기 위한 고집이었다고 평한다. 실제 선조는 칠천량 전투 대패 소식을 들은 후 '이 패전은 누구의 잘못도 아닌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라는 무책임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선조가 원균을 감싼 데에는 둘이 인척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원균은 당시 서인 영수 중 한 사람인 윤두수와 인척관계였는데 윤두수는 선조와 인척관계였음. 선조는 신립장군처럼 자신과 인척관계에 놓인 무장들을 중용했기 때문에 원균도 총애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사실 원씨 집안은 고려 시대부터 내려오는 명문가로 대대로 무과 집안이었다. 아버지 원준량을 비롯하여 원균의 형제와 조카들도 무과에 급제하였고, 첫째 동생 원연은 사마시에 급제한 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용인에서 왜군을 맞아 대승을 거두어서 적성현감과 양주진관병마절제도위에 올랐고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다시 의병을 모아 왜군을 막다가 전사했다. 셋째 원전은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 고령현감으로 원균과 함께 참전하였다가 육지로 도망친 형과 달리 배에서 끝까지 남아 싸우다 전사하였으며, 외아들 원사웅도 전공으로 관직에 올랐고 원균과 함께 싸웠는데 아버지가 저지른 사고를 뒤치다꺼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원균 집안 후손들이 원균 재평가를 운운하면 "차라리 원연이나 원전을 재평가받아라."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원균의 사망도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조정의 공식입장은 원균이 칠천량 해전 이후 가덕도로 도주했다가 적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인데, 칠천량에서 살아서 돌아온 선전관 김식의 보고에 따르면 그의 죽음을 확인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고양인 평택에 가묘를 만들어 봉했다. 그런데 원균의 실제 시신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봉분이 통영에서 발견되었다. 통영시 고성군 거류면 당동리 국도 77호선 주변 마을 텃밭 인근에는 인근 마을 주민 사이에 ‘엉규이(원균의 지역적 발음으로 추정) 무덤’ 또는 ‘목 없는 장군 묘’로 불려 온 봉분이 있다. 여러 기록과 연구에서 이 묘가 원균의 묘라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이 무덤이 진짜 원균의 묘라면 지금까지 그나마 원균이 패전의 책임을 지고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것도 아니고 도망치다 비참하게 죽고 조선 수군을 궤멸시킨 장본인이라는 낙인 탓에 후손조차 애써 외면해 왔고 그동안 무관심 속에 방치됐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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