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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균관, 차례 간소화 거듭 권고
    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3. 1. 18.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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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례는 조상에게 달과 계절, 해가 바뀌고 찾아왔음을 알림과 동시에 시식과 절찬을 천신하는 의례이다. 과거에는 여러 번의 차례가 있었으나 현재는 명절로 통합되었다고 보면 된다. 차례에 차를 올리는 것은 사실 중국의 전통이다. 우리나라는 중국의 유교를 받아 내려오면서 차례라는 이름을 쓰긴 했지만 차를 올린다는 개념보다는 조선시대 관혼상제의 규범이었던 주자가례에 있던 천신례와 참례가 차례로 통합되면서 이름만 가져온 거라고 보면 된다. 과거에도 벼농사를 짓던 지역에서는 차례를 지냈으나, 밭농사를 주로 하던 북부지방에서는 차례가 유명무실하다가 차례가 전국적인 명절로 확산되자 나중에야 추석에 차례를 지내는 풍습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여담으로 조선시대땐 차 문화가 거의 없어졌는데 남부 지방의 사원들에는 차 문화가 법제화되어 남았다. 한반도에 차는 7세기때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 이후 흥덕왕 때 당나라에서 차 종자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으면서 본격적으로 퍼졌다고 한다. 신라시대에는 승려나 화랑들이 차가 정신을 맑게 해 준다 하여 수행의 일환으로 차를 마셨다고 하며, 고려시대에는 왕실과 귀족, 사원 등에 차가 유행했다.



    차례는 말 그대로 차를 올리는 것으로 말 그대로 다과상의 개념이었다. 제사도 차례에 고기 탕, 국, 나물 정도가 추가됐는데 주자가례를 봐도 포, 채, 과 이런 식으로 뭉뚱그려놨을 뿐이다. 심지어 조선 초기는 차례 준비는 남자들이 했다. 원래 제사는 왕족이 하늘에 지내던 것인데 이게 유교의 확산과 함께 하늘+조상에게 하는 걸로 바뀌고, 임진왜란 이후 몰락한 양반들이 시골로 귀향하면서 돈으로 양반이 된 신흥 양반들과 자신들을 구분짓기 위해 족보학과 제사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 이후 조선 말 계급질서가 붕괴하면서 상민들이 군역을 피하기 위한 신분세탁으로 양반이 70%까지 차지하게 되었고, 갑오경장을 통해 신분제가 철폐되면서 벼락부자들과 친일지주들이 양반 행세를 하게 되면서 차례를 지내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서 차림이 화려해졌다. 이후 70년대 박정희 때 가정의례준칙이라는 걸 만들면서 국가주도로 표준을 만들면서 홍동백서니 조율이시니 그런 게 생겼다. 즉, 지금 차례 시스템은 기껏해야 50년밖에 안 된 전통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또한 조상 상까지 모시는 것도 나중에 생겼다. 조선조 경국대전에 따르면 3품관 이상은 고조부까지 4대 봉사(奉祀)를 지내고, 6품관 이상은 증조부까지 3대 봉사, 7품관 이하 선비들은 조부모까지 2대 봉사를 하고, 서민들은 부모만 제사를 지내면 된다. 그 전까지 양반집에서만 하던 제사를 서민들도 지내게 된 시점은 18세기 영정조 시대로 학계에선 본다. 이때 제례와 함께 족보 문화, 장남 위주의 상속 문화 등 양반의 관습이 서민층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이후 갑오경장 이후 반상이 무너지면서 너도나도 높은 양반처럼 4대 봉사를 하는 현상이 생겨났다. 마치 높은 벼슬이 있는 집인 양 4대 봉사를 하고, 2대 봉사만 하면 우리 집이 상놈 취급받는다는 인상이 생겨버린 것이다. 4대 봉사를 한다고 하면 기본 8명에 작은할머니까지 합하면 10명 이상으로 늘어난다. 현대 학계에서는 "생전에 면식이 있는 부모와 조부모로 축소해서 제사를 모시는 게 바람직하다"라고 하고 있다. 퇴계 이황의 형 온계 이해 선생의 종가는 4대 봉사를 한날한시로 정해 거행하고 있으며, 안동의 다른 종가에서도 기제사를 합사하는 집안이 늘고 있다.



    제사에 생전에 돌아가신 분이 좋아하던 음식을 올리는 것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애초에 예서 어디를 봐도 '반드시 이걸 놓아라'거나 '이건 놓지 말아라'는 규율이 없다. 지역마다 나는 과일과 특산품이 다르기 때문이다. 오히려 조상님들이 살아생전 좋아하셨던 음식을 제사에 올리거나 맛보지 못한 음식 구해서 드리는 것도 하나의 예일 수 있다. 많은 음식을 차려 제사에 찾아온 친지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체면과 허례 의식 때문에 음식 가지수가 크게 늘게 된 것이라는 지적에 맞추어 볼 때 확실한 건 음식의 가짓수가 중요한 건 아니라는 것이다. 제사음식을 준비하고 차리고 정리하는 노동은 여성의 몫이고 제례 의식은 남성남 참여하고 즐기는 향유물로 전락한 것도 문제다. 그렇게 전통과 법도를 따질 거면 주자가례를 따르면 된다. 주자가례에는 "조상 제사를 지낼 때 제물 진설을 가장과 주부가 함께 한다. 특히 술을 올릴 때 첫 잔(초헌관)은 가장이 올리고, 두 번째 잔(아헌관)은 주부가 올린다"라고 되어 있다. 제례 문화는 예로부터 가가호호 다르다고 했고 퇴계 선생도 '시류를 따르라'라는 교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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