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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가톨릭 전파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3. 2. 5. 23:59300x250
조선 가톨릭 전파는 다른 나라들과는 진행 방식이 다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성리학에 대한 비판과 실학사항이 대두되면서 '서학'으로 천주교 교리가 들어오게 되었다. 중국을 통해 들어온 천주교 교리는 학자들을 중심으로 학문으로 성장했고, 18세기 후반부터 신앙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당시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선교사들은 중국은 고유의 전통과 높은 문화 수준을 가졌으므로 서양의 과학, 철학, 음악, 지리학 등 다양한 지식과 세계관을 전파해야만 중국 선교가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러 서양 학문을 들여오게 되었다. 이러한 '서학'을 조선의 지식인들이 중국에서 배워와 공부하면서 천주교의 '천주(天主)’와 유교에서 가리키는 ‘천(天)’을 연결하여 이해하게 되었고 천주교가 유교의 이해를 돕고 유교를 보완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관점을 보유론적 천주교 신앙이라고 한다. 이때 이벽과 이승훈이 북경으로 가서 천주당의 선교사를 만나 필담을 통해 천주교와 학문에 대해 얘기를 나눈 후 1784년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승훈은 중국에서 주교와 신부들이 거행하는 미사와 성사들이 조선에서도 시행하고 싶었다. 그래서 한국으로 와서 자신들이 직접 신부를 뽑아 미사와 성사를 진행했다. 이후 주교에게 사제 서품을 주는 것은 주교만의 권리이며 자신들의 행동이 교회법을 어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라 성사를 중단하고 중국의 구베아 주교에게 조선으로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4년 후인 1794년 중국의 주문모 신부가 최초로 한국으로 넘어온다. 주문모 신부는 서울과 지방을 돌아다니며 미사를 집행하고 필담을 통해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었으며 교리를 가르쳤다. 또한 신자들 가운데 회장들을 임명하여 교회에 지도자를 세우고 명도회를 만들어 조선 교회를 체계화시켰다. 명도회의 선교활동으로 조선의 신자수는 주문모 신부 입국 후 5년 만에 4천 명에서 1만 명으로 크게 증가한다. 그리고 1845년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한국 교회 최초의 사제 서품을 받게 된다.
이후 한국 가톨릭은 네 차례의 박해를 통해 최소 8천명에서 최대 5만 명이 학살당했다. 오죽하면 마포구 합정동에는 절두산 성지가 있는데 이곳이 가톨릭 신자들 머리를 잘라 한강에 그대로 내던지는 산이었어서 이름이 절두산((切頭山)이 되었고, 합정동(合井洞)이라는 동명 역시 이곳에 있던 우물 바닥에 조개껍질이 많아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인근 절두산에서 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하다 보니 사형도구로 쓰는 칼을 빨리 갈기 위해 판 우물이라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도 그의 능력이 아까웠던 조정에서 "천주교만 버리면 살려주는 건 물론 벼슬도 내리고 후하게 보상도 하겠다"라고 회유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참수를 당했다. 군사정권 때도 김수환 추기경이 군사독재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하자 박정희가 로마 교황청에 전화를 걸어서 '김수환을 파면시키라'는 요구를 했다고 한다. 전화를 받고 어이없었던 교황청에서 나중에 김수환 추기경에게 넌저시 '이런 일이 있었다'라고 알려줬다고. 하여간 이렇게 지속적인 박해를 받으면서도 뿌리를 내린 한국 가톨릭을 두고 "피 위에 세운 교회"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일반적인 기독교 전파는 '선교사가 그 지역으로 떠나서 기독교에 대해 강론하고 전파하여 신자들을 늘린다'는 식으로 이루어지지만 한국의 경우 '자체적으로 종교학을 연구해 신자가 된 후 선교사를 와 달라고 요청한다' 는 역순으로 된 사례이기 때문에 로마 교황청에서도 매우 기적적인 사례라며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다. 당시 로마 교황이었던 비오 6세는 프랑스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에 기독교 사상 유래가 없는 자생구법의 기적을 전해 듣고는 보고기록을 탐독하며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며 자신의 비상금을 털어 당시 추기경이던 그레고리오 16세에게 전해주었다. 이후 바티칸에서는 한국 가톨릭을 꽤 이뻐하는(?) 경향이 있는데 바티칸을 방문한 김수환 추기경에게 방문시간 조절 등 최대한 배려를 해 주고, 103위 순교성인 시성 때도 많은 편의를 봐주었다. 또한 성인 시성식이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 집전되야 하는 관례를 깨고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 가톨릭 전래 200주년 기념으로 방한하여 여의도광정에서 직접 시성식을 집전하였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유일하게 평신도로부터 자생적으로 신앙이 전파된 한국을 높이 평가하는 발언을 공식석상에서 하기도 했다.300x250'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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