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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가 공동묘지터였다는 괴담은 근거가 있다?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2. 6. 20. 15:07300x250
초등학교가 공동묘지터였다라는 괴담은 의외로 근거가 있다고 함. 조선시대에는 사대문 안과 도성 밖 십리 내에 묘를 쓰는 것을 금지했음. 조선 말기까지 사대문 안 묘를 쓰는 것을 금하는 원칙은 지켜졌으나 도성 밖 10리 내 금지 규정은 점점 깨졌음. 이와 관련된 지형이 신당동과 아현동인데 신당동은 광희문 밖에 망자를 좋은 곳으로 보내기 위한 무당들이 모여 살던 동네여서 붙은 이름이고(갑오개혁때 한자가 바뀜), 아현, 즉 애오개는 '아이고개'에서 유래가 되었는데 도성의 시체 중 아이의 시신은 서소문을 통해 나갔는데 이 때 나간 아이 시신이 묻힌 곳이 아이고개라는 뜻의 아현이라고 불렸다고 함. 그밖에 금호동과 용산 등에도 공동묘지가 자리잡고 있었다고 함. 또한 일제강점기때 일본인들의 주거지였던 이태원과 장충동에 일본인의 공동묘지가 형성되었음.
그러다가 살기 어려워진 농민들이 경성(지금의 서울)로 몰려들게 되면서 과밀화되고, 조선총독부는 대경성계획과 경성의 경계를 기존의 4배로 넓히는 확장안을 발표함. 그러면서 새로 경성이 된 신당동, 아현동, 장충동, 이태원 등의 공동묘지는 미아리 등 경성 외곽으로 이전하고 인근의 서민 밀집 주거지에 필요한 공공행정시설을 건축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일제강점기 보통교육시설인 '국민학교'였고, 그 국민학교가 지어진 곳이 공동묘지터였음. 또한 이태원과 장충동 일대는 일본인을 위한 고급 주택지인 문화주택지구로 개발되었음. 그러다가 서울이 더 확장될 때도 미아리의 공동묘지를 망우리로 옮기고 미아리 공동묘지는 다시 주거지와 국민학교 부지 등으로 개발되는 방식이 이어졌고, 이는 인천, 부산 등의 다른 대도시도 동일한 프로세스로 '도시 확장 -> 외각 공동묘지 이전 -> 공동묘지 자리에 주거지와 학교 건설'이 이루어짐.300x250'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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