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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글 기계화의 아버지, 공병우 박사
    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3. 3. 16.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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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병우 박사. 한글 기계화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한국 최초의 안과의사이기도 했다. 1938년 서울 안국동에 한국 최초의 안과 병원을 개업해 잘 나가던 공병우 박사는 어느 날 한 눈병환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한글학자 이극로 선생이었다.(독일 베를린 종합대학에 조선어학과를 창설한 분) 이극로 선생의 "한글로 우리 민족이 글눈을 떠야 문화의 힘을 기를 수 있다"는 말에 공병우 박사는 한글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공병우 박사는 일본에서 의학공부를 했기 때문에 나이 마흔이 넘어 해방이 된 후에야 정식으로 한글을 배울 수 있었다. 한글을 배우면서 한글의 우수성을 체감한 공병우 박사는 일본어로 된 시력검사표를 한글로 바꾸는 것부터 시작해 눈병 예방 한글 안내문을 무료로 배포하는 등 한글 보급을 위한 노력을 펼쳤다. 일본어로 된 자신의 안과 학 저서를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한글 타자기에 한계를 느껴 직접 한글 타자기를 만들기로 마음먹었고 1948년 한국 최초로 '세벌식 한글 타자기'를 개발하였다.

    해방 이후 한글 교육과 한글 가로쓰기가 사회적 과제로 부각되면서 한글 타자기 실용화 문제가 부각되었다. 당시의 4벌식, 5벌식 한글 타자기가 단점이 많았기 때문에 공병우 박사는 가로 쓰기가 가능한 한글 타자기 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이후 '초성 - 중성 - 종성'의 한글 창제 원리를 따라 '자음 - 모음 - 받침'의 순서대로 타자를 칠 수 있는 세벌식 타자기를 개발하였다. 이 세벌식 타자기는 가로모아쓰기를 실용적으로 구현한 최초의 타자기였다. 이후 6.25를 거치면서 한글 타자기의 효용성이 널리 알려지면서 지식인들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손글씨 대신 타자기를 이용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한글 사용이 증가하게 되었다. 이후로도 공병우 박사는 세벌식 타자기를 보완하여 1972년 기계식 타자기로는 유일하게 한글과 영문을 함께 입력할 수 있는 한영 겸용 타자기를 개발했다. 또한 안과의사였던 자신의 직업에 기초하여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재활교육에도 관심을 가져, 점자와 한글 타자기 사용법 및 제작 기술을 시각장애인들에게 가르치고 시각장애인용 한글 워드프로세서도 개발했다.

    공병우 박사는 한 때 대한민국에서 4번째로 세금을 많이 낼 정도로 부자였지만, 본인은 정작 돈 버는 것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민주화 운동에도 참여했는데 민청련을 지원할 때 현금으로 하면 문제 소지가 될 까봐 공병우 타자기를 수십 개 기증하는 방식으로 지원했다. 1953년 휴전 협정 당시 한국어 문서는 공병우 타자기로 쳤는데, 다른 나라 측 타자기들보다 더 빨라 찬사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한글 관련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에도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아래아한글도 이런 지원 하에서 탄생했다. 군사정권 때 정부가 표준 타자 방식을 훨씬 비효율적인 두벌식으로 정하자 이에 항의하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기도 했다. 김재규에게 사기를 당해 재산을 모두 날리고 도미했지만 한글 사랑을 멈추지 않았다. 1995년 89세의 나이로 노환으로 사망하자 당시 PC통신 게시판은 공병우 박사에 대한 조의글로 넘쳐났다. 컴퓨터로 한글을 칠 수 있게 만들어 주신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PC통신 게시판에 한 사람에 대한 조의글로 페이지를 가득 채운 것은 거의 최초의 일이었다고 한다. 사망 후 그의 시신은 장기기증 후 남은 시신도 해부용으로 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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