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금필. 평주 출신으로 태조를 도와 고려를 건국하는 데 커다란 공을 세운 개국공신이었다. 용맹이 매우 뛰어났다고 알려져 있는데, 북쪽 오랑캐들이 쳐들어오자 북번의 추장 300명을 복종시키고 그들의 부족 1,500명을 항복시키고 포로로 잡힌 고려인 3천 명을 귀환시켰다. 후삼국 간의 전쟁에서도 용맹을 떨쳤는데 견훤이 유금필이 전장에 나타난 것을 보고 두려워서 화친 제의를 받아들인 적도 있다고 한다. 왕건이 공산전투에 패해 위협에 쳐했을 때도 구해냈다고 하며, 고창 전투에서 선봉을 서서 적진에 뛰어들어 대승을 견인하였다.
이후 신하들의 참소로 곡도로 귀양을 떠났으나 대우도에 후백제군이 쳐들어오자 군대를 조직하고 전함을 수리해 후백제군을 물리쳐 왕건이 다시 불러들여 중용하였다. 이후 80기만으로 서라벌을 공격한 후백제군을 물리치는가 하면, 운주성 전투에서도 크게 승리해 술사 종훈과 의사 훈겸, 용장 상달, 최필 등을 사로잡아 웅진 이북의 30여 성이 고려에 항복하게 했다. 이후 금산사에 감금당했던 견훤이 탈출하자 이를 보호하여 고려에 오게 했으며, 후삼국시대의 마지막 전투인 일리천 전투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이후 6년 후인 941년에 세상을 떠났다.
유금필은 후삼국시대 최고의 용장으로 손꼽히기에 절대 부족하지 않은 활약을 보였다. 말갈족의 기병은 물론 수군까지 능수능란하게 지휘했다고 하니 개인의 무용은 물론 장수로서의 역량도 뛰어났다. 여진족들에게서 대추장이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통솔력 또한 뛰어났다. 의외로 개국공신으로서의 등급은 낮아 1, 2등 공신 목록에 없는데 무명은 있었으나 왕건의 역성혁명에 가담하지 않아 공신 목록에 뒤쳐졌다는 설, 왕건이 일부러 그를 위해 공신 목록에서 뺐다는 설 등이 있다. 개국공신 명단에 없지만 유금필의 딸은 태조의 9번째 비인 동양원부인이 되었으며, 유금필이 사망한 후에는 태사로 추증되고 충절이라는 시호를 받아 태조의 배향공신(큰 공이 있는 공신을 왕실의 사당인 종묘에 모셔놓은 영예로운 직위)에 오를 정도였다.
얼마나 왕건의 신임을 얻었는지는 왕건의 유언 중에 "유금필의 자손이 죄를 짓더라도 따지지 말고 중용하라"를 보면 알 수 있다. 실제 그 후손들 중에 사고를 쳤지만 죄를 묻지 않고, 유금필의 자손이라는 이유만으로 벼슬을 받은 사례가 있다고 한다. 유금필의 후손 중 손자 유방이 1차 여요 전쟁에서 소손녕의 요나라군을 격파하는 공훈을 세워 '과연 유금필의 후손이다'라는 평을 들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