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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일러스트레이터의 시조. 알폰스 무하
    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3. 10. 29.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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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폰스 무하(1860~1939). 체코 출신의 화가, 디자이너. 현대 일러스트와 그래픽디자인, 애니메이션의 시조라고 평가받고 있으며 현대의 많은 일러스트레이터와 상업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산업과 예술을 이어준 디자인, 즉 산업디자인의 시조로도 평가받는다. 특히 아르누보의 거장 무하의 화풍은 일본 만화계에 엄청나게 큰 영향을 미쳤다.

    무하는 시골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그리기를 하며 놀았으며 독실한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세 때 화가의 꿈을 안고 프라하 미술대에 지원했지만 낙방했고, 비엔나의 유명 극장 무대미술팀 견습생이 됐다. 하지만 회사가 화재로 소실돼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 고향인 모라비아 지역의 지주였던 쿠엔 벨라시 백작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후원자가 되어 독일 뮌헨 미술대에 입학했다. 이후 바이에른 법령에 의해 거주가 불안정해지자 벨라시 백작은 27세의 무하를 프랑스 파리로 이주시켜 30세까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었다.

    이후 무하는 슬라브 공동체의 도움을 받아 삽화가로 생계를 유지했다. 또한 인쇄소에 근무하며 교정과 삽화를 그리면서 지냈는데 아무도 출근하지 않는 휴일에도 나와서 근무할 정도로 근면했다고 한다. 그러던 1894년 그의 인생을 바꿀 사건이 생겼다. 당시 그가 근무하던 인쇄소는 당시 프랑스 최고의 연극배우였던 사라 베르나르가 감독하고 출연한 연극 '지스몬다'광고의 포스터 제작을 맡았는데, 1월 4일 공연 개막을 앞두고 크리스마스까지 포스터 컨펌이 나지 않은 상태였다. 다른 직원들이 모두 휴가를 떠나 포스터를 만들 수 없었던 상태여서 인쇄소 운영자는 무하에게 포스터 디자인을 맡겼는데 무하는 리허설 중인 연극 무대를 스케치해서 사람을 실물 사이즈로 그린 대형 석판화를 1월 30일에 만들었다.

    1월 1일이 되자 이 포스터는 파리 시민들에게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 포스터가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사람들은 하룻밤사이에 포스터를 다 떼갔으며 베르나르는 이 포스터를 4천 장 추가 주문한 후 그와 6년 계약을 맺었다. 의상과 무대 디자인도 그에게 맡겼다. 하루아침에 프랑스의 모든 사람들이 화가 무하의 이름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무하는 프랑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상업화가가 된 후 1903년까지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우리가 많이 접하는 무하의 작품들은 주로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의 작품활동 후반부에 가면 점점 그의 화풍이 무겁고 종교적으로 변한다.) 행사와 광고 포스터부터 파리 만국박람회 포스터, 달력 등 수많은 작품들을 선보였다. 장신구 작업에도 일가견이 있었는데 하도 의뢰가 많이 들어오니까 무하가 이거 보고 자신에게 의뢰하지 말라고 자신의 컨셉 디자인을 모두 담은 책인 '공식 자료집'을 출간해 버렸다. 그런데 이 책을 본 사람들이 역으로 디자인 의뢰가 쏟아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무하는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가 1910년까지 체류한다. 미국에서 순회전시회를 개최했으며, 뉴욕 내 독일 극장의 디자인을 제작했다. 1910년 체코로 돌아와서도 프라하 시립회관 시장홀, 체코슬로바키아 신정부를 위한 각종 양식 디자인, 비투스 대성당 스테인글라스 등을 제작했다. 말년에는 슬라브 민족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화 겸 서사시인 슬라브 서사시를 제작했다. 프랑스 정부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은 것도 이때였다. 이후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략, 민족적 색채를 드러낸 그를 불온인물로 간주해 핍박했고 고령의 그는 지독한 문초에 시달리다 결국 폐렴으로 사망했다. 나치의 장례식 참석 금지조치에도 불구하고 무려 10만 명의 인파가 그의 장례식에 참가했다.

    그의 사후 그의 작품들은 나치와 공산주의의 손을 피해 고향 모라비아의 작은 성에 숨겨졌다. 이후 소련의 지배를 받으며 공산주의 사상에 반하는 상업주의 작가로 매도되고 20세기 말까지 잊혀진 작가가 되었으나 이후 재평가를 받으며 명성을 되찾았다. 취향을 타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친숙하며 기호화된 자연물과 인물을 이용한 그의 그림은 후대 일러스트레이터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계에 많은 영향을 주어 일본 망가와 게임 등 서브컬처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CLAMP, 로도스도전기, 프린스세스메이커, 죠죠의 기묘한 모험 등의 언급할 수 없을 만큼의 많은 만화와 게임 디자인 등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무하는 최초의 '스타 디자이너'로서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있던 예술을 인쇄를 이용한 포스터와 달력을 통해 누구나 즐기고 접할 수 있는 대중예술로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즉, 현대미술의 '팝아트' 개념의 선구자이기도 한 것이다. 상업화가의 최정상에 오르기도 했지만 의외로 민족적 색채가 강하기도 하다. 그의 후기 작품들은 그의 조국과 슬라브 민족들을 그린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다. 그가 죽기 전까지 모든 걸 쏟아부은 슬라브 서사시는 전체 길이만 120m에 달하는 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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