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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파는 혐한이었다?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3. 11. 19. 00:10300x250
북송 때 명 시인이자 정치가였던 소동파(동파는 호이고 이름은 소식이었음)는 당송팔대가 중의 하나로 그의 시는 당시 송나라는 물론 주변 국가들에도 널리 알려졌다.
특히 고려인들의 소동파에 대한 사랑은 매우 컸다. 특히 문인들과 지식인 계층에서의 소동파에 대한 사랑은 현대의 아이돌 팬심에 못지않았다. 동파의 문장은 금은보화가 창고에 가득한 부잣집 같다고 하는가 하면 그의 시를 일컬어 황하를 터트린 듯하며 만장의 불꽃처럼 세차다고 극찬했다. 과거 합격자가 33명이 나오자 '올해도 소동파가 33명 나왔다'라고 할 정도였으며 '소동파와 비슷하다'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의 아버지 김근은 자기 자식들 중 셋째와 넷째 아들의 이름까지 소동파 형제의 이름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그런데 소동파는 지금 보면 혐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한국을 싫어했다. '고려 오랑캐와 절대 상종하지 말라' 는 요지의 상소문을 7번이나 올렸고 고려인들을 보고 '머리에 상투를 튼 짐승들이 사납게 쳐다본다.', '원숭이가 사람을 희롱한다는 말이 이치에 맞는다.' 라며 모욕적인 언사를 하기도 한다. 소동파는 고려가 사신을 빌미로 경제적 이득을 너무 봐서 송나라의 손해가 너무 크며, 고려는 해외의 오랑캐이자 거란의 앞잡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고려 사신이 와서 바치는 공물에 비해 송나라가 내주는 답례와 고려 사신을 맞는데 드는 비용이 너무 커서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으며, 우리가 준 하사품들을 거란에 넘겨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고려가 송나라에 와서 얻은 정보를 거란에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당시 송나라의 처지를 생각해 보면 소동파가 왜 고려와 고려의 사신을 그렇게 싫어했는지 이유를 알 수도 있었다. 당시 북송은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의 압박을 받았고 서쪽의 서하의 눈치를 봐야 했다. 또한 당시 북송은 극심한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고통을 받아야 했는데 그 와중에 그전까지 중앙정부에서 책임지던 고려 사신 접대는 고려 사신이 지나가는 각 군현으로 떠맡겨져 지역 백성들이 힘들어했다. 심지어 고려사신이 물을 숙소인 고려정을 지으라는 황명이 내려와 백성들이 못 견뎌 도망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럼 고려가 진짜 소동파의 생각대로 송나라에 양아치 짓을 했을까? 그건 또 아니었다. 거란이 고려를 침공하자 고려는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원병을 요청했으나 송나라는 거란의 눈치를 보며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고려의 서희가 쳐들어오는 거란과 담판을 지어 고려가 거란에 조견하고 거란의 연호를 쓴다. 대신 강동 6주는 고려가 갖는다고 담판을 짓는다. 서희가 고려가 거란의 연호를 쓴다고 고려를 욕할 게제는 아니라는 거다. 이후에도 고려는 끊임없이 거란과 외교전을 보이면서 송나라에 동맹을 타진했으나 송나라는 고려의 손을 거부했다. 후대 중국학자 중엔 만일 이때 송나라가 고려와 손을 잡았다면 거란의 국력을 크게 약화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극단적으로 고려를 싫어한 소동파의 행적은 당대에도 문제가 되었다. 소동파의 정적들은 '바다 건너 고려한테는 왜 그렇게 싫은소리를 하면서 바로 옆에 있는 서하나 요한테는 찍소리도 못하냐?' 며 소동파의 이율배반적 행동을 공격했다. 그렇게 고려를 대놓고 욕해서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가 단절되면 요가 송을 침공해 올 때 도움을 받지 못할 텐데 이걸 막을 방법이 있느냐고 지적할 때는 소동파도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못했다. 또한 고려 사신들 때문에 송나라의 경제가 휘청거린다는 소동파의 주장에 대해선 송나라의 경제적 불안은 매년 송나라가 서하와 요에 바치는 수십만의 세폐가 가장 큰 이유인데, 세폐를 받지도 않는 고려 사신이 오는데 비용이 많이 든다고 고려를 욕해선 되느냐고 따졌다. 결국 소동파는 '자신이 아둔하여 적과 아군을 구분하지 못했다.' 며 황제에게 용서를 구했고 황제는 동파로 인해 마음이 상했을 고려인들을 다독여 주라는 명을 내렸다고 한다.
하여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우리 조상들의 소동파에 대한 짝사랑은 고려부터 조선까지 이어져 조선 중기 권력을 잡은 노론이 자신들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인 정이가 그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소동파를 경멸하는 스탠스를 취하기 전까지 계속 이어졌다. 이후 연암 박지원이 중국의 연경을 찾았을 때 소동파의 혐한론을 알게 되고 그의 유명한 저서 '열하일기'에 ‘우리나라가 동파에게 잘못 보였던 모양이다. 동파는 고려와 사귀는 게 실계(失計)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가 쓴 글들을 보니 모두 국가를 위한 깊은 걱정이다.’라고 적어 놓기도 했다. 일제시대 때 시인 이은상이 소동파의 적벽부가 적힌 시를 걸어 놓은 식당을 발견하고 주인에게 "고려를 혐오했던 자인데 이게 뭔 짓이냐"라고 호통쳐서 주인이 액자를 뗀 이야기를 수필로 남기기도 했다.300x250'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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