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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
    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3. 12. 21.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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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 1819~1901)은 독일 작센 공의 차남인 앨버트 공(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1819~1861)과 결혼했다. 빅토리아는 대단한 미남이었던 자신의 사촌을 보자 첫눈에 반했으며 그가 겸손하고 뛰어난 인품까지 갖춘 인물임을 알게 되자 완전히 빠져버려 즉위 3년 뒤 직접 청혼했다. 사실 빅토리아 여왕은 '모름지기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의 말을 따라야 한다'라는 당시 가치관이 맘에 들지 않았고 결혼하면 남편과 권력을 공유해야 하는 것도 싫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 1세처럼 독신으로 살고 싶다고 여러 번 얘기했었지만 앨버트가 그녀의 마음에 너무 쏙 들었고, 마침 당시 수상이었던 멜번과의 스캔들을 잠재울 필요성도 있었기 때문에 결혼을 결심했다. 결혼식 날 여왕은 흰색 옷을 입고 식을 올렸는데, 그 이후 신부가 흰색 드레스를 입는 게 전 세계의 트렌드가 되었다 한다.

    이들 부부는 금슬이 좋기로 유명해서 슬하에 9남매를 두었다. 하지만 둘의 결혼생활은 처음엔 순탄치 않았다. 국민들은 '작센은 어디 박혀 있는 나라냐?' 라며 여왕이 가난뱅에 외국인 왕자와 결혼한 것에 못마땅해했다. 또한 두 사람의 성격도 천지차이였는데 여왕은 새벽까지 놀고 뜨는 아침해를 보고 싶어하는 스타일이었지만 앨버트 공은 밤 10시만 되면 어김없이 잠자리에 드는 스타일로 진중하고 이성적이었다. 반면 빅토리아는 전제적이고 권위적이었지만 실용적 감각과 융통성을 겸비하고 있었고, 앨버트는 관념적이고 도덕주의자에 융통성이 부족한 면이 있었다. 자식을 교육할 때도 완벽주의적이고 엄격하고 억압적인 면이 있어서 평범한 재능의 자식들이 힘들어했다고 한다.(이는 장녀인 비키가 너무 뛰어나서 기대치가 높아진 탓도 있기도 하다)

    특히 빅토리아는 주치의들이 조지 3세나 앤 여왕처럼 피에 굶주린 정신이상자가 되는 거 아니냐고 걱정할 정도로 고집불통에 변덕스럽고 불같은 성격이었는데 오직 앨버트 공만이 그녀를 잘 받아주었다고 한다. 그래도 여느 부부처럼 부부싸움이 없을 수는 없었는데 둘의 부부싸움은 보통 빅토리아가 신경질을 냄 → 이성적인 앨버트가 논리적으로 그녀의 잘못을 열거하거나 가르치려고 하거나 아예 입을 꾹 닫고 그러려니 하고 무시함 → 열받은 빅토리아가 앨버트를 쫓아다니면서 짜증을 쏟아 부음 → 참다못한 앨버트가 그만하라고 소리치거나 뛰쳐나가는 패턴이었다고 한다. 재미있게도 이렇게 부부싸움이 일어난 후에는 흥분이 가라앉은 빅토리아가 상대방이 맞고 자신이 너무 화냈음을 인정하고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를 깊이 사랑했으며 서로를 이해하는 동반자였다. 앨버트는 죽기 직전 스콕마르 남작에게 쓴 편지에서 "내일이면 우리의 결혼 생활이 21년을 맞이하는데 그간 얼마나 많은 장애들이 우리의 결혼 생활을 가로막았는가? 그러나 그 와중에서 우리의 결혼 생활은 활력에 찬 뿌리를 돋아내며 신선하고 청아하게 지속되었다."라고 쓰기도 했다. 국민들도 점차 여왕과 그의 남편의 모범적이고 서로를 사랑하는 가정생활에 호평을 보냈다. 앨버트는 여왕의 앞으로 나서서 권력을 휘두르지 않았으나 정치적으로 빅토리아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고 빅토리아 역시 앨버트에게 많이 의존했다. 앨버트 공이 진두지휘한 1851년 런던 박람회가 대성공하자 아내인 빅토리아가 더 좋아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독일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당시 상류층들에게서 은근 배척되었다고 하며, 크림 전쟁 발발당시에는 국가 기밀을 빼돌렸다는 혐의를 받아 국가반역죄로 런던탑에 감금되었다는 신문기사가 나기도 했다.

    앨버트는 앨버트 왕세자가 아일랜드 여배우와의 스캔들로 여왕과 다투고 학교로 돌아가버리자 비를 맞으며 아들을 설득하러 갔다가 병을 얻어 사망했다. 주치의는 당시 장티푸스가 사인이라고 진단했지만 그 이전부터 위경련과 통증 등으로 고생했던 점을 봤을 때 크론병이나 신부전증, 또는 위암이 사망 원인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앨버트가 사망하자 빅토리아 여왕은 "이제 나를 빅토리아라고 불러 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라며 깊은 절망에 빠졌고 반쯤 실성했다. 머리맡에 앨버트의 사진을 걸어놓고 그의 셔츠를 안고 잠이 들었다. 시녀들은 여왕이 죽을 때까지 40년 동안 존재하지 않는 알버트를 위해 의상을 준비하고 세면 할 물을 갈았다. 빅토리아 여왕은 깊은 슬픔에 빠져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시달리며 윈저 궁 깊숙이 은둔해 버렸고 죽을 때까지 검은색 옷을 입었다. 또한 남편이 망나니 아들을 훈계하러 무리하게 움직였다가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죽는 날까지 아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영국 사우스켄싱턴에 가면 빅토리아 여왕이 남편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빅토리아&앨버트 박물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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