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여몽전쟁 고려의 항복과 쿠빌라이의 즉위 나비효과
    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3. 12. 30. 00:10
    300x250

     

    1231년 시작된 여몽전쟁은 28년간 지속되었다. 결국 힘에 부친 고려는 몽골에 항복을 하기로 하고 늙고 병든 고종 대신 태자가 북행길에 나서게 되었다. 당시 몽골의 칸은 몽케였는데 그는 남송 원정을 위해 수도를 떠나 있었다. 태자는 그를 만나러 수천리 길을 갔는데 가는 중 고종의 부음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역만리 떨어져 있던 태자는 3일 동안 상복을 입고 예를 표한 뒤 다시 길을 나섰다. 그런데 남송을 공격하던 몽케 칸이 급사를 해 버리고 말았다. 이후 몽골은 후계자 자리를 놓고 두쪽으로 갈라져 싸웠다. 

     

    이때 태자는 쿠빌라이를 만나 그에게 항복을 선언했다. 당시 중원을 장악하고 있던 쿠빌라이는 군사력과 경제력으로는 강했으나 몽골 본토와 중앙아시아의 몽골인으로부터 지지를 받던 아리크부카에 비해 정통성이 부족했다. 그런데 자신들의 선조가 아무도 정복 못한 고려가 자신에게 항복을 하게 되었으니 이는 쿠빌라이에게 큰 기회였다. 쿠빌라이는 "고려는 예전에 당 태종이 친히 정벌했어도 항복시키지 못한 나라가 아닌가. 그런 나라의 세자가 제 발로 걸어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 라며 기꺼워했다.

    세자는 쿠빌라이에게 매우 과감한 항복조건을 내세웠다. '의관(풍습)을 유지한다. 조정에서 보내는 사신 외 다른 사신은 금한다. 강화도를 나와 개경에 돌아오되 그 일정은 역량에 맞춰서 진행한다. 압록강 유역의 몽골군을 철군한다' 등의 '항복은 하지만 우리는 우리 맘대로 살겠다'라고 할 수 있는 파격적인 항복조건이었다. 하지만 쿠빌라이는 '한 나라를 그냥 얻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인 데다 후계자 싸움에서 큰 정통성을 얻게 되는 상황이었으니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후 고려 공략에 동원되었던 만주 지역의 동방 3 왕가로 대표되는 초원 이남 지역 몽골 귀족들도 쿠빌라이에게 동조하면서 쿠빌라이는 쿠릴타이를 개최, 제5대 대칸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이후로도 쿠빌라이는 '지금 세상천지에서 고려만큼 대우받는 나라가 없다" 라고 생색을 낼 정도였다고 하며, 고려 왕실의 후원자를 자처했다. 그에게 항복하고 고려로 돌아가 즉위한 원종이 임연에 의해 폐위되자 압박하여 무진정변을 끝냈다. 또한 이후 몽골의 내정간섭이 심해지고 고려를 원의 한 성으로 편입하자는 의견이 나왔을 때도 "세조(쿠빌라이)의 뜻을 거역할 거냐?"라는 반대논리로 무산시켰다.

    300x250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