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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어 양식의 선구자 조기채 연구관
    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3. 12. 31.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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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기채 전 국립수산과학원 연구관은 대학 낙방 후 2년제인 통영수산전문대학에 입학했다. 경남 하동군 청학동에서 조부모와 부모, 5남매가 함께 산 집은 그리 넉넉하지 않아서 자식들을 고등학교까지 교육시킨 그의 부모님을 주위사람들은 '무슨 호강하려고 그러냐?' 며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대학 동기들은 대부분 수산전문고를 나와서 수업을 따라갈 수 없었으나 부모님 욕먹는 걸 볼 수는 없다는 각오로 공부에 집중, 국립수산진흥원(현 국립수산과학원) 국가 연구직 5급 공개채용에 합격했다.

     

    주문진 수산종료배양장에서 전복, 멍게의 종묘 생산기술 개발을 담당해서 국내 두 번째로 전복 양식에 성공했고, 거제 배양장으로 자리를 옮겨 넙치 양식에 도전했다. 당시 넙치는 kg당 8만~10만원 하던 최고급 어종이었다. 85년 광어 새끼 13만 마리를 얻어내 종묘 개발에 성공했고, 이후 광어 양식 때 광어에게 먹일 사료도 개발했다. 90년대 들어서 어민들을 대상으로 수정란 분양과 양식 교육을 실시했고 넙치는 광어란 이름으로 국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횟감이 되었다. 그는 넙치 연구의 성과로 진급하여 본원으로 들어왔다

    3년 후인 2001년 부안 수산종묘배양장을 맡았다. 2003년부터는 참조기 종묘 개발에 돌입해서 2005년 세계 최초로 참조기 종묘 개발에 성공했다. 우리보다 수산 연구가 10년 앞선다는 일본도 못한 일이었다. 이후 서해연구소 양식과장이 되었는데 태안 기름 유출사고(삼성 1호-허베이 스피릿 호 원유 유출 사고) 당시 피해 현황 조사팀 총괄책임을 맡았다. 이후 통영의 남동해 수산연구소장으로 부임했을 때 200억 원이 넘는 피해가 발생한 통영 연안의 대규모 적조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2015년 국립수산과학원을 정년퇴임한 그는 부안의 백학과 여수 참꼬막 양식을 산업화하지 못한 게 가장 아쉬운 일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은퇴 후에도 경상남도 수산자원연구소 전문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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