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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을 받았지만 회사와 국가에 버림받은 나카무라 슈지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4. 2. 19. 00:20300x250
2014 노벨 물리학상은 청색 LED를 개발한 공로로 아카사키 이사무 교수와 아마노 히로시 교수, 그리고 니치아화학공업의 개발자인 나카무라 슈지 3명에게 돌아갔다. 아카사키 이사무 교수와 아마노 히로시 교수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만들기 어렵다고 생각했던 질화갈륨을 이용한 청색 LED 개발에 매진했고 1500번 이상의 실험을 거쳐 완성했다. 하지만 나카무라 슈지는 이들과 전혀 관련 없이 독자적으로 청색 LED의 개발과 상용화에 성공했다.
나카무라 슈지는 도쿠시마대 대학원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한 후 1979년 니치아화학공업에 입사했다. 입사당시 니치아화학공업은 매출액 40억 정도에 CRT모니터나 형광등에 사용되는 형광체 재료를 생산, 판매하는 지방 중견기업이었다. 직원들의 대다수는 농업을 투잡으로 삼고 있었다. 나카무라는 이중 거의 유일한 순수 샐러리맨이었다. 나카무라는 개발과에 배속되었는데 부서원은 그 포함 세명뿐이었으며 전자 관련 학문을 전공한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개발팀은 곧 없어질 것이다라는 루머가 돌았으며, 회사의 다른 사람들은 '나카무라는 무위도식한다.', '돈 안되는 것만 만든다.' 는 빈축을 듣기 일수였다. 그는 영업팀에서 '장사가 잘 될 것 같은데요?' 라며 제안한 인화갈륨이나 갈륨비소 , 갈룸알루미늄비소 등을 개발했으나 개발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개발에 필요한 기기와 부재료가 하나도 없어서 나카무라 스스로 공부해 가며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다. 영업담당자가 반도체 재료에 대해 잘 몰라서 그도 영업에 뛰어들었고 고객 불만사항도 그가 직접 처리해야 했다.
이후 나카무라는 청색 LED의 시장성이 크다고 생각해서 청색 LED의 개발을 제안했지만 회사에서는 아무도 성공한 사례가 없다며 만류했다. 회사의 상사들은 그를 볼 때마다 "아직 퇴사하지 않았냐?" 며 물었다고 하니 그의 말을 들을 리 없었다. 수억 엔이나 드는 예산도 걸림돌이었다. 결국 나카무라는 거절당하면 회사를 그만둘 각오로 사장과 담판을 지었는데 의외로 그동안 나카무라의 실력을 인정했던 사장이 흔쾌히 OK를 해 주었다. 다른 대기업들도 청색 LED를 개발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카무라는 대기업이 사용하지 않는 재료를 사용했다. 제품 개발이 어렵지만 효율은 훨씬 좋은 질화갈륨을 선택한 것도 그때문이었다.
그가 청색 LED의 개발을 시작하게 된 이유 중 다른 하나는 플로리다 대학교에서 교환 연구원으로 갔던 와중 박사 학위가 없다고 무시를 당한 것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보다 어린 동료 연구원이 그를 '기술자' 취급을 했으며 머리를 쓰지 않는 허드렛일이 그의 차지였다. 박사과정은 연봉 10만 달러를 받는데 나카무라는 기술자라고 3~4만 달러밖에 주지 않았다고 한다. 오죽하면 노벨상 수상 직후 연구의 원동력을 기자가 묻자 "분노다. 그것이 내게 모든 동기부여를 했다." 고 답하기도 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논문 5편을 내면 대학원에 가지 않아도 박사 학위를 주는 제도가 있었는데 결국 그는 세기적 발명인 청색 LED의 발명 성과를 정리한 것으로 박사 논문을 썼다.
청색 LED의 개발 역시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예산은 계속 추가로 들었고 그는 계속 맨땅에 해딩을 해야 했다. 회사에서 성능은 좀 떨어져도 빠른 상용화를 요구하며 그를 압박했다. 여러 어려움 끝에 그는 유금속 화학증착 장비인 MOCVD를 개선, 질화갈륨을 기판에 증착시키는 방법을 개발해 내고 1993년 기존에 판매중인 청색 LED의 약 100배 밝기의 청색 LED를 개발해 낸다. 그제서야 주위에서도 그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1999년 니치아화학공업을 퇴사하고 캘리포니아대 산타바버라캠퍼스 교수로 이직한다. 사직 이유는 회사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발명 특허는 회사가 독점했고 나카무라에게는 보너스로 단돈 2만 엔만 보상했다. 나카무라가 청색 LED를 개발하고 난 후 유명세를 타자 더이상 개발에 투입하지 않고 그를 강연과 회사 홍보로만 돌린 것도 불만이었다. 창업주인 회장은 나카무라를 믿고 개발을 지원해주었으나 (나카무라는 청색 LED 연구를 허락해 주고 미국 유학도 배려해 준 창업주를 가장 감사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후임인 사장(창업주의 사위)은 나카무라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청색 LED의 상용화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개발 중지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2000년 이치아는 나카무라를 기업비밀 유출로 제소했다. 집은 물론 대학 연구실도 조사를 받아 추진하던 연구도 중단되게 하는 등 그를 계속해서 집요하게 괴롭혔고 분노한 나카무라도 2001년 니치아를 제소한다. 4년에 걸친 청색 LED소송전에 시작이었다. 결국 2004년 1월 도쿄지방재판소는 나카무라의 손을 들어주어 이치아가 나카무라에게 200억 엔을 지불할 것을 명령했다. 당시 니치아는 청색 LED의 매출이익률이 60%에 달할 정도로 나카무라가 만들어 낸 청색 LED로 돈을 벌고 있었다. 직장인들은 나카무라를 응원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 기업에서 직무발명에 대한 보수제도가 재검토됐다. 니치야는 판결에 불복해서 항소했는데 고등법원은 모든 특허에 대해 니치아가 8억 4천엔을 지불하는 것으로 니치야와 나카무라의 화해를 권고했다. 나카무라는 당시 연구자와 엔지니어에 대한 일본 사화외 기업의 인식을 이겨내지 못하고 화해를 받아들였다.
나카무라는 항소심 후 분노에 차서 "일본의 사법은 부패했고 신뢰할 수 없다." 고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노벨상 수상 이후 강연에서 일본 사법제도의 문제점을 실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2005년 미국 시민권을 획득, 일본 국적을 포기했다. 또한 노벨상 발표 직후 일본에 대한 서운함이 컸다고 한다. 2014년 그가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된 후에도 일본 언론과 학계, 정부에선 그를 '제조 기술'로 수상했다고 폄하했다. 당시 공동으로 상을 받은 아카사키 교수와 아마노 교수는 '청색 LED를 발명했다' 고 하고 그는 '제조공정만 개발했다'고 한 것, 나카무라는 명백히 사실관계가 틀렸고 명예도 훼손된 내용에 대해 소송까지 검토했으나 실익이 없다고 판단해 포기했다. 노벨상 수상 후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미국에서는 누구나 아메리칸 드림을 꿈꿀 수 있지만 일본에는 진정한 자유가 없다" 라고 비판하기도 했다.300x250'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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