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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스티니아누스 1세
    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4. 3. 16.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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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스티니아누스 1세. 로마 제국 제61대 황제이자 동로마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왕조 제2대 황제.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불리던 동로마 제국의 가장 유명한 황제 중 하나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라고도 불린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로마 제국은 군사, 정치,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융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38년간의 치세 동안 많은 업적을 이룩했다. 기존의 로마법을 집대성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편찬했으며 이것이 바로 로마법 대전이다.,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 등 우수한 장군을 등용하여 북아프리카 반달 왕국을 공략하여 카르타고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이탈리아의 동고트족을 무찔러 이탈리반도를 획득하는 등 서로마제국 몰락 후 게르만족 수중에 들어갔던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를 되찾아 동로마제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했다.

    또한 대규모 건축사업을 벌인 왕으로도 유명하다. 각종 수로와 교량을 건설하고 지진으로 파괴된 도시의 전면적 재건축을 실시했다. 그밖에 변경지대의 요새와 방어 진지 건설 등 토목공사를 실시했다. 그가 건설한 가장 유명한 건물은 이스탄불의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으로 콘스탄티누스 2세가 지었다가 소실된 것을 재건하였는데 16세기에 스페인 세비야 대성당이 세워지기 전까지 세계 최대의 성당이었다. 기독교에 심취하여 위에 언급한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 외에도 많은 수도원과 고아원을 건설했으며 동서 교회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또한 교황권의 확립에도 이바지하였다. (이후 교황과 충돌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재위 말년에는 공적인 업무에서 한 발 물러나 신학 연구에 몰두했다. 사후에는 정교회로부터 시성 되어 성(聖) 유스티니아누스로도 불리며, 대제(Megas) 칭호도 받았다.

    반면 전임 황제인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화폐개혁으로 쌓아 놓은 국고를 정복사업과 페르시아와의 평화 조약, 하기아 소피아 성당 재건 등에 투입해서 국고를 탕진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아테네의 아카데미아를 이교적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폐교시킨 것 역시 후대 인문학자들에게 비판을 받는 부분이다. 군납비리를 저지른 사람을 친구라며 봐 주었다는 사례도 있고, 자신이 중용했던 벨리사리우스를 믿지 못하고 너무 심하게 견제해서 그의 지휘권을 뺏고 전 재산을 몰수한 점 등도 비판받는다. 참고로 그 군납비리업자는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의 감독관으로 매우 유능하여 당시 동로마제국의 국무총리+법무부장관급 인사였다고 한다. 게다가 전시 상황이라 그의 목을 치면 나라 전체가 돌아가지 못할 상황이었고 벨리사리우스와의 정치적 라이벌 포지션이라 원래 군납비리는 사형이 원칙이나 벌금형으로 감형시켰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결국 그 업자는 벨리사리우스와 황후 테오도라에 모략에 의해 감옥에 갇히고 정계에서 은퇴했다고 한다. (벨리사리우스는 엄청난 공처가로 유명했는데 아내가 테오도라 황후와 절친이었다고 한다)

    황후 테오도라도 입지적인 인물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곰조련사였다가 어린 딸들을 두고 일찍 죽었는데, 그녀는 생계를 위해 7살때부터 서커스 무대 위에 올라서 무언극을 했고, 총명한 데다 미모까지 뛰어나 그녀의 공연은 엄청나게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유스티니아누스를 만나게 되었고 그때부터는 양털을 자아 생계를 유지하는 등 조용하게 살기 시작했다. 유스틴아누스는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했지만 당시 배우는 비천한 직업으로 몸 파는 일도 함께 했기 때문에 귀족인 유스티니아누스의 가족들은 결사반대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결사반대하던 그녀의 외숙모가 사망하자 전대 황제인 삼촌을 구워삶아 '귀족 신분도 낮은 계급과 결혼할 수 있다'라고 법을 개정하고 그녀와 결혼했다.

    황후에 오른 테오도라는 매우 현명하여 남편과 거의 공동통치식으로 로마 제국을 운영했다. 모든 국사를 같이 의논했고 황제가 포고한 법률의 대부분은 테오도라의 조언에 의한 것이었다. 편견을 품었던 귀족들도 결국 그녀의 능력과 처신에 감탄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황제의 재임 초반 니카의 반란으로 유스티니아누스가 거의 제위를 빼앗길 뻔 한 상황이 되어 수도를 버리고 달아나려고 하자 여걸이었던 테오도라 황후가 황제를 붙잡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자가 권력과 위엄을 잃으면서까지 목숨을 연장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며 조언해 황제의 전의를 다시 불태우게 해서 결국 반란을 진압할 수 있게 하였다. 그녀가 죽은 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실의에 빠져 통치에 뜻을 두지 못하고 종교에 지나치게 집착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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