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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파/삼지창
    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4. 4. 5.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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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밀히 말하면 갈래창의 일종인 삼지창과 당파는 비슷한 모양이긴 하지만 그 근본이 다르다. 날이 3개, 혹은 4개 달린 갈래창은 원래 농어업이나 수렵도구에서 발전한 것으로 우리나라의 경우 이미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다. 조선 초에 만들어진 '국조오례의'에서는 극(戟)이라 하여 삼지창의 일종을 소개했는데 나무자루는 붉게 칠하거나 검게 칠하고 길이는 1장 6척(약 336cm)에 달했다. 조선 후기에는 주로 국왕의 의장행렬이나 관아의 의장물로서 사용되었는데 군왕과 관아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는 상징물이었다. 물론 본격적으로 사용된 건 아래 서술한 임진왜란을 겪은 후의 조선 후기였다.

    당파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받아들이면서 도입한 병기이다. 왜구가 쳐들어오자 명나라는 일본군의 특성을 감안해서 여진을 상대하는데 적합한 북방 기마병보다 왜구를 상대한 전술에 익숙한 '절강병법'에 단련된 남방 병력을 파견했다. 선조와 류성룡들은 이여송에게 조선군에게도 명나라의 '절강병법'을 가르쳐 줄 것을 요청했으나 이여송은 군사기밀이라며 거부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조선의 독자적인 군사서적들은 한양이 함락당하면서 같이 불타버렸고 군의 전력 강화를 위해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었던 터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결국 이여송 휘하의 무관을 매수해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얻어내었다.

    하지만 서적만 있을 뿐 훈련법이나 군대 체계를 구성하는 법은 몰랐기 때문에 70여 명의 병사들을 명나라 장수 낙상지에게 보내 은밀히 기효신서를 배우는가 하면, 한명회의 후손으로 의병을 일으켜 싸우고 있던 한교가 천문, 시리, 복서 등에 능통하다는 류성룡의 천거를 받아 그를 훈련도감의 낭청으로 임명해 '기효신서'의 해석과 번역 작업을 전담하게 했다. 이렇게 배운 기효신서는 조선 후기 군대의 체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또한 기효신서와 왜검법 등을 접목하여 사도세자가 18가지 보병무예가 수록된 무예신식 '무예신보'를 완성하였고 사도세자의 아들인 영조가 여기에 마상무예 6가지를 더하여 24가지 무예가 수록된 '무예도보통지'를 만들게 되었다.

    당파는 기효신서에서 받아들인 중국의 무기이다. 무게는 5근(3.2kg), 길이는 7척 6촌(159.6cm)인데 원래 중국 남부지방의 농민들이 사용하던 쇠스랑에서 비롯되었다. 무예도보통지에는 중국식 당파와 조선식 당파 두 가지가 들어있는데 중국식 당파는 창날일체형이고, 조선식은 좌우의 날을 별도로 만들고 그 가운데 긴 날을 끼워서 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에는 서로 모양이 수렴하여 중국식 당파와 조선식 삼지창을 구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당파는 기본적으로 적을 찌르는 무기로 세 갈래로 나뉜 창날은 훈련이 덜 된 농민 출신의 병사들이 왜구의 칼을 방어하거나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북방 기마병의 목, 혹은 말의 눈을 찌르는 데 효과적이었다. 무엇보다 이 당파는 화전을 발사하는 발사대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기효신서에 따르면 당파수 1명당 30발의 화전을 부대원이 나누어 지녔다가 적을 만나면 당파의 창날 위에 화전을 걸고 발사하게 했다. 이러한 화전 발사대의 용도는 조선 후기에 조총이 보급되면서 사라졌다.

    우리나라 사극에서 포졸들이 가장 많이 들고 다니는 무기 중 하나가 삼지창인데 엄밀히 말하면 포졸들이 가장 많이 들고 다니던 무기는 육모방망이나 쇠도리깨라고 한다. 또한 조선 후기라면 삼지창을 포졸들이 들고 다니는 것이 엄밀히 말해 고증오류는 아니나 임진왜란 때나 조선 전기 때 들고 다니면 고증오류이다. 사극에서 삼지창을 많이 쓰는 이유는 그냥 창에 비해 좀 멋져 보인다는 이유와 함께 사극촬영용으로 이미 많이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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