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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심의 역사와 기적의 5년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4. 6. 27. 00:10300x250
농심의 창업주인 신춘호 회장은 신격호 롯데 회장의 셋째 동생이었다. 신춘호 회장이 일본 롯데상사에서 근무할 때 삼양라면이 국내에 출시된 걸 보고 이미 일본에서 인스턴트 라면의 시장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형에게 사업 계획을 내놓는다. 하지만 신격호 회장은 일본과 국내 상황은 다르다며 이를 반대했고, 결국 신춘호 회장은 롯데에서 독립해서 롯데공업을 차리고 라면을 개발했다. 초기에는 실패를 반복했지만 1960년대 정부에서 추진한 혼분식 장려 운동 적분에 라면 시장이 급성장하였고, 이후 출시한 소고기라면의 성공으로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또한 신춘호 회장은 라면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해 스낵 사업에도 뛰어들어 새우깡을 개발 대성공을 거둔다. 이는 신격호 롯데 회장의 심기를 제대로 거슬렀다. 자신의 말을 거역하고 라면회사를 차린 데다 롯데제과와 사업이 겹치는 과자산업까지 진출했기 때문이다. 신격호 회장은 신춘호 회장의 회사명에 롯데라고 쓰지 못하게 했고 신춘호 회장은 이전에 출시해 히트 쳤던 농심라면에서 이름을 딴 농심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후 둘은 의절했으며 부모님 제사도 각자 지낼 정도였다고 한다. 이는 죽을 때까지 풀리지 않았다.
농심은 1982년 너구리, 1982년 육개장 사발면, 1983년 안성탕면, 1984년 짜파게티, 1986년 신라면 등 40년이 지난 현재까지 농심 라면을 대표하는 라면들을 개발했다. 이 때를 가리켜 항간엔 '기적의 5년'이라고 한다. 라면의 맛은 결국 수프에 있다고 판단, 라면수프만 전문적으로 개발, 생산하는 안성수프전문공장을 설립한 것이 주효하여 이후 히트상품들을 연이어 낸 것이다.
신춘호 회장의 사업자적 감각도 적중했다. 1970년 소고기라면을 출시할 때 맞춤법상 쇠고기라면이 맞지만 '쇠'라는 단어가 쇳덩이와 못 따위를 연상시킨다며 소고기라면이란 이름을 강행했던 신춘호 회장은 신라면 출시때도 당시 '식품의 상품명 표시는 한글이어야 하며 외국어를 함께 적고자 할 때는 한글 표시보다 크게 할 수 없다'는 법조항의 개정을 이끌어 낸 후 한자 상호인 '辛'자를 상호로 만들어 매운 라면이라는 강렬한 이미지를 주는 데 성공했다.
이후 농심은 86 아시안 게임 및 88 올림픽 공식 라면 공급업체로 지정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1985년 처음으로 시장점유율에서 삼양라면을 앞섰고, 1988년에 이르러서는 두 배 이상의 시장점유율을 확보하게 되어 1강으로 우뚝선다.300x250'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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