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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주만 공습당시 일본이 선전포고를 하지 않은 이유
    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4. 7. 17.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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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년 12월 7일 아침(하와이 시각), 일본 해군은 선전포고 없이 진주만에 기습 공격을 단행했다. 미군 기록에 따르면 사망자가 2,400명에 달하는데 이중 100명은 민간인이었다고 한다. 4척의 군함을 포함 6척의 배가 침몰했고, 항공기 188대가 파괴되었다. 미군은 본토가 기습을 당한 것도 당한 거지만 일본이 선전포고도 하지 않고 공격했다는 것에 대해 매우 분노했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이 미국에 선전포고 형식의 '대미통첩각서'(14-part message)를 보내긴 했다. 근데 이 문서가 전달된 시간은 진주만 폭격이 발생한 1시간 뒤였다. 원래 일본 정부는 공습 직전에 선전포고문을 발표하라고 지령을 내렸으나 당시 주미 일본 대사관에서 일어난 여러 골 때리는 상황으로 인해 전달이 지연되었다. 참고로 미리 말하지만 원래 계획대로 공습 직전에 선전포고문을 갖다 주었다고 해도 말이 안 되는 짓을 한 것임에는 바뀌지 않는다.

    번역이 늦어진 이유는

     

    1. 당시 주미 일본 대사관은 사실상 휴업 상태였다. 일촉즉발의 상황임에도 대사관 직원들은 비상근무는 커녕 단축근무를 일삼았다.

     

    2. 일본에서 암호문이 넘어와서 대사가 암호문을 해독하고 있던 시간에 대다수의 직원들은 전근가는 직원의 송별 파티를 점심부터 오후 내내 하고 있었다. 그리곤 파티 후 내일이 주말이라며 일찍 퇴근했다.

    3. 선전포고문이 1290자나 되는 긴 장문이라 번역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당시 보안인가를 받은 타자기를 사용하는 직원이 외국인이었는데 기밀문서라는 이유로 고위 관료가 직접 번역문을 독수리타법으로 쳐야 했다.

    게다가 위에 언급한 여러 요인들이 겹쳐서 시간이 늦어지는 바람에 문서의 14 Part 중 앞의 13 part만 영어로 번역했고 가장 중요한 결론이 들어 있는 14번째 part는 번역을 하지 못했다. 게다가 문서 표현 자체도 빙빙 돌리면서 언뜻 봐선 이게 선전포고인지도 알아보기 어렵게 되어 있었다.

    사실 일부러 포고문 같지도 않은 애매모호한 문서로 만든 이유는 일본측에서 일부러 미국에 시간을 주지 않게 하기 위한 얕은 속임수였다. 일본은 미 국무장관인 코델 헐의 대일 제안서(헐 노트)를 최후통첩으로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기습공격의 효과를 위해 일부러 애매모호한 표현을 사용했다.

    실제로 일본의 암호 전문은 미 정보기관에 의해 감청되고 해독되어 진주만 공습 3시간 20분전에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다. 하지만 문서 자체가 선전포고(declaration of war)가 아니라 각서(memorandum) 형식이었던 데다 5000 단어가 넘는 단어에 어디에도 '개전', '전시', '무력 사용' 등의 표현이 없었기 때문에 미 정부는 '만약의 사태가 일어날 수 있으니 경계를 강화하라'라는 정도의 지시만 내릴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진주만 공습이 일어난 후 한참 후에야 이 문서를 은 코델 헐은 이 문서를 가져온 주미일본대사에게 "이런 악질적인 거짓과 왜곡으로 가득 찬 문서는 공직 생활 50년 동안 처음"이라며 불같이 화를 내고 대사를 내쫓았다고 한다. 패전 후 일본의 도고 시게노리 외상은 선전포고문서를 왜 이렇게 습격에 임박해서 갖다 주었냐고 묻자 '개전 조약에 시간에 대한 언급이 없어서 그랬다'는 핑계를 대기도 했다. 종전 후 전시 총리였던 도조 히데키는 1948년 도쿄 전범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사형되었는데 죄목 중에 '선전포고가 없었던 진주만 불법 공격'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정리하자면 일본은 애초에 제대로 된 선전포고를 할 생각은 없었고, 진주만 공격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선전포고를 하는 '시늉'을 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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