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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나마타병
    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4. 11. 13.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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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나마타병. 수은에 대한 만성적인 노출로 발생하는 대표적인 공해병. 일본 구마모토의 미나마타 지역에서 발생해서 '미나마타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일본 4대 공해병 중 하나(나머지 셋은 이타이이타이병, 욧카이치 천식, 니가타현 아가마치에서 발생한 니가타 미나마타병)이다. 1956년 일본의 구마모토현 미나마타시에서 메틸수은이 포함된 어패류를 먹은 주민들에게서 집단적으로 발병하였다. 수은이 신체에 쌓이면서 인간의 신경계통에 심각한 타격을 주어 사지마비, 시각장애, 보행불능, 발음장애 등이 발생하며 사지 말단부에서 불수의적 운동장애도 발생한다. 감정의 변화 및 행동장애도 발생하여 심한 우울증부터 발광, 의식불명으로도 진행된다. 아이들은 사산되거나 기형아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마을 하늘을 날던 물새가 갑자기 땅에 떨어지고 고양이들이 미친 듯이 뱅뱅 돌며 입에서 거품을 내뿜는 등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춤추는 고양이 병'이라고 이름 붙였으나 이후 주민들에게도 증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병의 원인은 미나마타의 주요 기업인 (주)신일본질소주식회사(이하 칫소)에서 공장폐수를 바다에 그대로 버리면서 메틸수은에 오염된 어패류를 인간이 먹음으로써 체내에 수은이 축적되어 발생한 것이었다. 칫소는 메이지시대부터 있었던 회사로 처음에는 수력발전회사였으나 이후 전기를 이용한 카바이드 공장을 들이게 되면서 화학비료생산을 시작해 일본에서 중요한 화학회사로 성장했다. 이후 화학비료 외에 초산, 염화비닐이나 가소제 등을 생산해서 2차 대전 이후 일본의 고도경제 성장을 받쳐준 기업 중 하나였다. 칫소가 발전하면서 미나마타 지역의 인구가 늘었고 일본 유수의 공업도시로 발전했으며 전 공장장이 미나마타시 시장으로 당선되는 등 지역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주민들의 의존도도 크게 높아졌다. 그래서 미나마타병의 원인이 칫소의 원인이라고 지목되었을 때 오히려 칫소의 편을 들며 미나마타병 환자들을 비난하는 여론도 높았다고 한다. 이후 밝혀진 바로는 칫소는 폐수가 미나마타병의 원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공장 가동을 멈추지 않았고 1966년까지 정제하지 않은 폐수를 그대로 바다에 배출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미나마타병은 1956년에 공식적으로 확인되었으나 10년이 넘은 1968년에야 정부는 칫소에 의한 공해병이라고 인정했다. 이후에도 일본 정부는 원인 파악이나 환자 보상 등 사후대책에 있어서 마치 기업 편을 드는 듯한 소극적인 행보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1973년 칫소의 배상을 확정 짓는 최종 판결이 있었으며, 이후 환자들과 칫소 간의 보상협정이 맺어졌다. 하지만 미나마타병은 근본적인 치료법이 없어서 환자의 대부분은 통증을 없애기 위한 대중요법이나 기능회복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또한 고령화가 되면서 요양보호자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정부가 공식 인증한 환자는 2,265명이며 그 외 1995년 공식적인 희생자로 인정받지 않았지만 칫소에게 재정적인 보상을 받은 사람이 약 1만여 명이다. 하지만 완전한 역학 조사가 시행되지 않았고 이미 사망한 환자들의 정확한 집계가 되지 않았으며 환자들이 재정적인 보상을 얻디 위하여 자발적으로 신청한 경우만 인정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수치라고 볼 수는 없다.

    미나마타병이 발생했을 당시 환자들은 전염병이나 기이한 병으로 의심받고 지역에 의해 이지메를 당했다. 이후 원인이 칫소가 버린 수은이라는 것이 밝혀졌어도 칫소에 의존하고 있던 시민들은 미나마타병 환자들을 '재판이나 보상으로 칫소를 위협하는 존재다'라면서 싫어했다. 미나마타병 환자를 위한 인증 협회는 칫소의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해 인증 요청자들을 거부하라는 강력한 압박을 시민사회와 정재계로부터 받았다. 또한 환자들 중에 '가짜 환자가 있다'는 소문도 도는 등 주민들 간의 대립이 격렬해지기도 했다. 사실 미나마타병은 일본 특유의 폐쇄성으로 인해 잘 알려지지 않다가. 1960년대 미나마타 지역을 방문한 사진작가 구와바라 시세이가 미나마타병과 관련한 사진 전시회를 도쿄에서 열고, 유진 스미스가 미나모토병에 의해 기형아로 태어난 딸을 목욕시키는 일본인 아내의 사진을 실은 에세이집이 출간되면서 관심이 높아졌다. 스미스 부부는 미나마타병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헌식했고 보상권 및 인식을 위해 투쟁하였는데, 스미스 씨는 1972년 그의 폭로를 막기 위한 칫소가 고용한 깡패들의 폭행으로 한쪽 눈의 시력을 잃고 6년 후 사망했다.

    구마모토 현은 미나마타 지역의 바닷속에 대한 수은 농도를 조사하여 수은농도가 25ppm 이상인 곳은 14년 동안 485억엔을 투입해 매립공사를 실시했다. 또한 미나마타시 앞바다의 만 전체를 쇠사슬로 봉쇄하고 어획통제 등 관리를 실시하다 1997년 구마모토현 지사가 안전선언을 했고 경계망을 풀었다. 이후에도 어패류 수은조사를 계속 실시하고 있다. 미나마타병과 이와 관련된 환경 시위들이 일본의 민주화에 도움을 주었다는 평가도 있다. 옴진리교의 아사하라 쇼코가 이 질병 때문에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주변 이웃들의 심각한 냉대와 비난을 받았다고 하며 그것이 아사하라 쇼코가 일본 사회에 대한 증오를 품게 된 원인이 아닌가 하고 그의 형이 인터뷰하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해당 지역에 미나마타병 환자가 있었다고 인정했으나 이미 대부분의 환자들이 사망한 뒤였다. 2020년 유진 스미스의 실화를 다룬 영화 미나마타가 제작되었다. 조니 뎁이 주연을 맡았는데 미나마타시와 칫소는 영화에 대해 철저한 비협조로 일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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