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조선시대의 명재상 정홍순
    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5. 1. 18. 00:10
    300x250

     

    정홍순(鄭弘淳, 1720 ~ 1784). 조선 후기의 호조판서, 동래 사람으로 아호는 호천이라 하였다. 예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영조 21년 정시문과에 급제한 후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호조판서가 되었다. 호조판서로 있는 10년 동안 재정 문제에 특히 능해 당대 제일의 재정관으로 명성을 떨쳤다. 호조판서는 나라의 재정을 다스리는 직이라 여러 구설수에 오르는 일이 잦아 단명할 경우 1년을 넘지 못하는 직책이었다. 하지만 그는 재정관으로 10년(햇수로 11년)을 역임했는데 이는 조선 역사상 최장기록이다. 

    청렴결백하고 일 잘하기로 유명했으며 암행어사로도 활동하여 부패함 탐관오리들을 적발했다. 매사에 청렴하며 재정관으로서의 역할은 물론 가사에 있어서도 검소와 절약을 바탕으로 한 생활태도를 견지함으로써 백성들의 칭송이 끊이지 않았다. 시호가 정민(靖敏)으로 내려졌다가, 뒤에 충헌(忠憲)으로 개시(改諡)되었다. 아래는 그의 일화이다.

    - 관직에 오르기 전 임금의 동구릉 행차 구경을 갔다가 한 젊은 선비에게 여분의 우립을 빌려주었는데 그 선비가 비가 그치고 약속한 날이 지나서도 우립을 돌려주러 오지 않자 직접 찾아갔다. 계속 귀찮게 하자 화가 난 선비가 낡은 우립 하나 갖고 그렇게 성화냐며 화를 내고 새 우립을 사 준다고 했으나 정홍순은 '내가 돌려받고 싶은 것은 우립이 아니라 신의요' 라며 기어이 우립을 찾아왔다. 이후 호조판서시절 신임 호조좌랑이 들어왔는데 20여년 전 그 우립을 돌려주지 않던 선비였다. 정홍순은 '남의 갈모를 돌려주지 않았으니 신용이 없음을 가히 알 수 있는 터라 어찌 국가의 중요한 재산을 맡아 관리할 수 있겠는가' 라며 그에게 사직서를 내도록 했다.

    - 평안감사시절 관아의 기생이 정홍순의 담배를 훔치다 걸렸다. 정홍순은 노발대발하며 기생의 종아리를 피가 나도록 때렸다. 얼마 뒤 대청에 있던 큰 거울을 관아에서 일하던 통인이 실수로 깨트린 일이 있었다.(당시 거울은 엄청난 사치품이었다.) 정홍순은 통인을 엄하게 꾸짖을 뿐 다른 처벌을 내리지 않았다. 이후 정홍순의 아들이 하찮은 담배를 훔친 기생은 엄히 벌하고 귀한 거울을 깬 통인은 벌은 안주고 야단만 치냐고 묻자 "기생이 담배를 훔친 것은 나쁜 버릇이고, 통인이 체경을 깬 것은 실수로 그런 것이니 조심하라고 당부만 하면 된다. 사람이 살아가면 실수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니라."라고 대답했다.

    - 어느날 호조의 부하 직원이 일가친척이 다 그에게 매달려 군식구가 스무 명이나 된다는 것을 알고는 '호조에 있으면 온갖 청탁과 비리에 얽힐 소지가 높은데 자네처럼 먹여 살릴 식구가 많으면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 있다'며 파직시켜 버렸다. 이후 그 부하의 다른 친척들이 모두 제 살길을 찾아 떠났고 식구가 여섯밖에 남지 않은 것을 보고 다시 취직시켰다.

    - 어느 날 정홍순이 가지고 있던 엽전이 두동강이 났다. 그러자 그는 공인을 불러 엽전 두 냥을 주고 땜질하여 고쳤다. 왜 두 냥이나 들여 한 냥짜리 엽전을 고치냐고 묻자 "나 개인은 한 푼을 잃었어도 나라에는 한 푼이 이익이 되니 어찌 이익이 아니겠는가"라고 답하여 사람들이 그의 도량에 탄복했다

    - 정조가 즉위한 후, 자신의 아버지인 장헌세자의 장례가 어떻게 치루어졌는지를 알고 싶어서 당시 예조판서였던 정홍순을 불러 물어보았다. 정홍순은 미리 장례 때 사용한 물품들과 장부들을 보관해 두고 있었다가 정조에게 고하였다. 정조는 부장품이 풍부하고 예에 빠진 것이 없음을 보고는 이를 매우 가상히 여겨 그를 우의정에 제수하였다.

    - 정홍순이 집수리를 한 후 수리에 대한 품삯 때문에 천민인 수리공과 언쟁을 할 일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아들이 한 나라의 재상이 어찌 천민과 다투냐며 그냥 품삯 좀 더 주면 되지 않느냐고 묻자 정홍순은 "정승은 한 나라의 의표인데, 내가 삯을 과하게 주면 온 나라의 예가 되어 빈한한 백성들이 많은 곤란을 겪게 된다"라고 답했다.

    - 정홍순의 딸이 결혼할 때 혼인 비용을 묻길래 사위는 장인이 혼인 비용을 대 주려나 하고 기대하였으나 정홍순은 감감무소식이었다. 결국 새색시는 평소 입던 옷을 입고 혼수도 없이 시집을 가게 되었고 사위는 장인의 인색함에 자린고비라며 치를 떨었다. 이후 사위가 처갓집에 볼 일이 있어 갔는데 정홍순은 저녁 때가 되자 집으로 가서 저녁을 먹으라고 사위를 축객했다. 화가 난 사위는 다시는 처가에 발도 들이지 않겠다며 연락을 끊었다. 그런데 3년 후 정홍순이 사위를 불렀다. 사위는 가기 싫었으나 한 나라의 정승인 장인이 불러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정홍순은 사위에게 "지난날 혼례 비용을 알아보았는데 그 돈을 헛되이 낭비할 수 없어 그 돈을 늘려 집과 밭을 샀으니 이 땅문서를 받아가라"라고 하며 땅문서를 건네주었다.

    300x250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