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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 6.25에 참전한 이유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5. 2. 28. 00:10300x250
6.25에 참전한 영국군 포병연대 소속 통신병 덕 레이랜드 씨가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즉위를 기념해 직접 그린 현수막 앞에 서 있는 사진. 이 현수막은 2014년 영국 정부에 반환되었다. 사실 영국은 미국과는 다르게 한국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나라였다. 그런데도 6.25가 발발하자마자 노동당과 보수당이 계파를 뛰어넘어 한반도 출병을 기정사실화 했고, 전쟁 발발 두 달도 채 되기 전에 영국의 첫 부대가 부산항에 도착했다. (당시 6주가 걸리는 항해 기간을 생각해 보면 엄청나게 빠른 행보였다.)
하지만 반대 기류 또한 분명히 있었다. 사실 영국은 6.25 전쟁 반발 시 한국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상황이 아니었다. 의회에선 참전에 적극적이었지만 많은 관료들이 참전에 반대했으며, 국민들의 여론도 참전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실제로 영국은 매우 빠르게 참전을 했지만 초기 참전에는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런 복합적인 상황에서 영국이 6.25에 참전한 가장 큰 이유는 미국에 대한 부채감 때문이었다고 보인다. 당시 영국은 유엔의 주도적인 회원국으로부터 미국이 혼자 지고 있는 부담을 덜어주어야 한다는 대의명분을 거론했다. 즉, 2차 대전 이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던 미국과의 특별한 동맹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자국의 안보와 경제적 이익에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다. 미국 주도의 UN군 참전 요청에 영국이 적극적으로 응답한 것은 이러한 미영 동맹을 강화하고 국제사회에서의 영국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영국은 당시 공산주의 팽창에 따른 안보 위협도 크게 우려했다. 6.25는 냉전의 초기 단계에서 발생한 매우 임팩트가 큰 사건으로 자유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대표적인 대립 중 하나였다. 영국은 당시 미국과 함께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하는 '봉쇄 정책'을 지지하고 있었는데, 만일 한국이 북한에 의해 점령된다면 동아시아 전체로 공산주의가 확산되어 홍콩이나 말레이시아 등 영국의 식민지와 영향권에 대한 위협이 될 것으로 인식했다.
당시 영국의 스탠스와 경제적 이해관계도 작용했다. 2차 대전 이후 영국은 제국주의적 영향력이 약화되고 있었지만 여전히 글로벌 강국으로서의 위상 유지를 원했다. 영국은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UN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군사적, 외교적 리더십을 보여줄 기회로 삼고 싶었다. 또한 아시아 지역의 정치적 안정은 영국의 무역과 경제적 이익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여러 이유 때문에 영국은 전쟁 발발 단 4일 만에 파병을 결정했고, 영국군의 첫 부대는 8월 중순 부산에 도착했다. 이는 영국 해군이 러시아의 부동항 확보를 위한 남진 정책을 저지하겠다며 남해 거문도항을 무단 점령한 1885년 이후 첫 한반도 출병이었다.
영국군의 스탠스도 계속해서 바뀌어 초기에는 전쟁 참여에 소극적이었으나 이후 총 파병 병력 약 56,000명의 병력들이 교대 병력으로 지속적으로 투입되었다. 이는 연인원 10만 명에 달하는 수치였으며 최대 배치 시점은 약 14,000명에 달했다. 이중 약 1,078명이 전사했고 2,674명이 부상을 입었다. 실종자도 179명을 기록했다. 이는 37,000여 명이 전사한 미군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희생이었다. 전쟁이 장기화되고 사상자가 늘어나자 영국 내부에서도 전쟁의 피로감과 부정적인 여론도 점차 커져갔다.
여담으로 6.25에서 영국군의 가장 큰 전투는 1951년 4월 벌어진 임진강 전투였는 제29 보병여단이 중국군의 대규모 공세를 막아낸 전투였다. 특히 글로스터 대대는 UN군의 후퇴 시간을 벌어주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300x250'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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