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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8 민주화 운동과 프로야구, 그리고 해태 타이거즈
    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5. 5. 18.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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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2년 후인 1982년 프로야구가 개막했다. 이는 당시 군사독재정권에서 3S 정책의 일환으로 국민의 관심을 정치에서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우민화 정책의 일환이었다. 

    5.18의 비극과 아픔이 남아 있는 광주에는 해내 타이거즈가 연고팀으로 깃발을 올렸다. 원래 5공 군사정권의 수장 전두환은 광주 지역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우려해 연고지를 만드는 것을 반대했지만 다른 지역에 하나씩 야구단이 생기는데 호남만 비어 있다면 소외론이 나올 수도 있고, 호남 지역민의 정치 관심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는 참모들의 말에 마음을 바꿨다.

    출범했지만 해태 타이거즈의 외형은 초라했다. 당시 원년 6개 구단 중 가장 적은 15명의 선수로 창단할 정소로 선수층이 얇았다. 대학 재학 중이던 방수원과 이상윤, 김일권 등은 대학을 중퇴하고 해태에 입단했다. 그 과정에서 김일권은 한국야구협회(KBO 말고)로부터 징계를 받기도 했다. 투타겸업으로 뛴 김성한의 경우도  사실은 선수부족을 메꾸기 위한 궁여지책 중 하나였다. KBO 리그 역사에서 선수 9명으로 한 경기를 치른 사례가 딱 두 번 있었는데 모두 1982년 해태가 기록하였다.

    당시 해태타이거즈 선수들 중에는 학생시절 목격하거나 어른들에게 들어서 광주 시민들의 희생을 겪은 선수들이 많았다. 실제 당시 영남대 소속이던 방수원의 경우 대학재학 중 광주제일고등학교 야구부 선수들의 피칭을 봐주고 있다가 광주일고 선수 중 한 명이 야구 유니폼을 입은 채 지나가던 계엄군 트럭에 욕을 하고 도망갔다고 한다. 결국 계엄군은 그 학생을 쫓아 광주일고 선수들이 묵던 여관까지 쫓아왔고 방수원의 배에 대검을 들이대며 죽여버리겠다고 했다고 한다.

    당시 거리에서 시민이 군인의 총칼에 의해 죽어나가던 와중이라 방수원은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다고 하며, 그 때 당시 광주일고에서 초교고급 투수로 이름을 날리던 선동렬의 아버지 선판규 씨가 계엄군을 향해 무릎을 꿇고 빌었고 마침 계엄군 장교가 고교야구 마니아라 선동렬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판규 씨의 얼굴을 봐서 물러갔었다고 한다. 이렇듯 당시 해태타이거즈의 팀 정신에 광주의 아픔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줬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이듬해인 1984년부터 우승을 거머쥔 해태 타이거즈는 프로야구 최강팀의 자리로 군림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당시 군사정권은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추모와 해태 타이거즈의 좋은 성적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소요 사태로 이어지지 않을까 불안해했다. 그래서 1982년을 제외하고 1983년부터 1999년까지 5월 18일 즈음에 광주 홈경기를 치루지 못하게 KBO에 압력을 넣었다. 해당 내용은 실제 문건이 발견되면서 사실로 입증되었는데 1986년 보안사가 KBO에 하달한 문서에 의하면 5월 18일 광주 무등 야구장에서 예정된 MBC 청룡과 해태 타이거즈의 경기 장소를 바꾸라는 지시였고, 해당 경기는 문서 내용대로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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