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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검은 히틀러 이디아민
    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2. 9. 15.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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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디 아민(Idi Amin). 1924년 우간다 북서부 콩고 국경 너머의 아루아에서 족장의 아들로 태어남. 족장의 아들이지만 가난해서 어려서부터 일을 해야 했는데 193cm의 거구를 이용해 권투와 럭비선수호 활약하기도 함. 1946년 영국 식민지였던 우간다 식민지군에 입대함. 이후 1962년 우간다 독립 이후 1966년 총리였던 밀턴 오보테를 지지하며 우간다 초대 대통령인 무테사 2세를 축출, 육군과 공군 최고 수장으로 선임됨. 이후 1971년 밀턴 오보테가 싱가폴에서 열린 국제회의 참석하던 사이 군사 구테타를 일으켜 대통령이 됨. 웃기게도 서구 국가들은 좌파 정권을 무너트린 이 구테타를 환영하고 인정했다 함. 정권을 잡은 이디 아민은 의회를 해산하고 정당활동을 금지시킨 후 1976년 종신대통령을 선포함. 대통령이 된 후 자신의 권력유지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을 실시하여 오보테 전 대통령과 지지세력을 포함하여 3천여명의 반대파 정치인들과 군인들을 살해함.



     이디 아민은 종교 집회 외의 모든 집회를 금지하였고 모든 재판도 군사재판에서만 이루어지게 함. 모든 우편물은 검열되었으며 이후 우간다의 모든 지식인, 장교, 법관들을 숙청함. 이 때 수십만 명(최소 10만~최대 80만)에 이르는 우간다 국민들이 희생당하며 국제사회에서는 이디 아민을 '검은 히틀러'라고 비난함. 실제 이디 아민은 자신을 무슬림이라 주장하며 백인들에게 자신의 가마를 들게 하고 이스라엘의 적이라고 공언했으며, 히틀러를 찬양하며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미화하고 유대인들을 추방함. 이후 '아프리카화 캠페인'이라며 아시아인과 인도인들도 추방함. 인도인들은 당시 우간다에 진출한 인도인들이 가게나 공장들을 운영하며 경제의 중요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이들을 무턱대고 내쫓을 때는 국민들이 환호했으나 이들의 공장이나 가게를 물려받은 우간다인들이 기술력이 없었기 때문에 폐업할 수밖에 없었고 우간다의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짐. 그 와중에 농업 역시 망해서 국민들을 엄청나게 피폐해짐.



    그 와중에도 1975년 아프리카연합기구인 OAU의 의장으로 선출된 이디 아민은 (당시 아프리카는 많은 나라들이 우간다처럼 독재국가였음) 대통령이 된 후에도 자신의 적들을 처형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음. 수도에 강제 수용소를 지었는데 전기가 흐르는 물 웅덩이로 둘러싸인 이곳에서 기아와 질병, 총상이나 질식으로 무려 20만명이 사망했다고 함. 못이 박힌 마루 위를 맨발로 걸어가게 하거나 쇠망치로 머리를 쳐서 즉사시키거나 성고문을 하고, 수감자의 신체 일부를 절단한 후 다른 굶주린 죄수에게 먹였음. 남자는 쇠꼬챙이로 찍거나 잘라서 거세시켰고 여자는 성고문을 가했음. 이디 아민이 직접 때려 죽인 죄수만 200명이 넘는다고 함. 그밖에 정적들을 산 채로 탱크로 뭉개거나 머리를 잘라 자신의 집무실 냉장고에 넣고 감상했다고 함 특히 이렇게 죽인 시체를 악어가 가득한 나일강에 던졌는데 얼마나 사람들을 많이 던졌는지 악어가 먹고도 남은 시체가 간에 가득했고 먹이를 받아먹는 것에 익숙해진 악어들이 게을러지고 온순해져서 동물학자들이 경악했다고 함.



    이디 아민은 7명의 처와 40명의 아내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혼한 아내가 자신의 아이를 낙태하자 아내와 산부인과 의사를 처형한 후 부인의 시체를 팔다리를 절단해 바꾸어 붙인 뒤 이혼한 다른 아내들에게 보내주었다고 함. 그밖에 살아있는 독사를 바로 잡아 회친 다음 외교 사절에게 권하거나 맘에 안드는 각료의 뺨을 때리고 다리 밑으로 기어가게 시키거나 기분에 따라 처형하는 등 기행도 일삼음. 이러한 독재와 악행 때문에 국민들의 지지가 떨어졌고, 이디 아민은 외부의 적을 만들어 자신에 대한 비난을 해소하기 위해 탄자니아에 전쟁을 선포함. 하지만 자신의 예상보다 탄자니아군이 강력해서 우간다군은 패전하였고 이디 아민의 독재에 맞서 조직된 반정부군인 국민해방전선에게 1979년 정부군이 패배하게 되자 이디 아민은 리비아로 탈출함. 리비아에서 그의 망명을 달가워하지 않자(카다피의 딸을 건드렸다는 설이 있음) 다시 이라크로 망명함. 그러나 이디 아민은 사담 후세인에게서도 홀대를 받다가 사우디아라비아로 다시 망명하여(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함) 이곳에서 천수를 누리다 2003년 사망함.

     

     

    이디 아민에 대한 여담으로 그가 식인을 즐겼으며 국민들 앞에서 자신이 분석한 인육의 맛을 논하거나 자신의 열 살 난 아들의 심장을 꺼내 먹었다는 얘기도 있고 이런 이야기들이 영화화되기도 함. 하지만 본인은 이를 극구 부인했으며, 그에게 죽을 뻔했던 요리사도 그가 인육을 먹지는 않았다고 증언함. 이디 아민은 사우디 성직자들에게 자기가 살인은 했지만 식인은 하지 않았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으며 자신에 대한 그런 이야기가 도는 것에 대해 매우 기분나빠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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