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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려지지 않은 한국계 일본야구선수 김경홍
    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2. 9. 22.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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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홍은 부모가 모두 한국인인데 일본으로 넘어온 후 김경홍을 비롯한 자식을 낳았다. 김경홍의 경우 일본 법무성에서 직접 찾아와 귀화를 시켰는데 귀화 심사도 없이 귀화를 시켜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로 인해 끝까지 귀화 안한 장훈과 비교되어 한국에서는 '일본으로 귀화한 개'라고 비난받고 언론에도 일본인으로 소개되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쪽발이라 비난받고 일본에서는 조센징으로 차별받았지만 최초로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이 한국인이라고 대놓고 얘기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한다 (이건 좀 정확하진 않음) 갓 창단되어 약체팀인 고쿠테츠 스왈로즈(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시즌 중인 여름에 17살의 나이로 입단했다. 명문 와세다대를 포함 많은 곳에서 스카우트전에 참전했으나 빨리 돈을 벌어서 부모님을 편하게 모시고 싶었던 김경홍은 당시 신인 계약금 최고 금액을 받고 프로행을 선택한다. 입단한 첫 해 당시 일본 프로야구 역대 두번째 최연소 데뷔 완투승을 기록했고, 다음해에는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연소 노히트노런 기록을 세우며 20승 고지에 오름. 또한 최초 왼손투수 노히트노런 기록이었다.



     데뷔 6년차인 1957년에는 주니치 드래곤즈를 상대로 퍼팩트게임을 달성했는데, 9회 1사에서 체크 스윙 판정을 두고 주니치에서 심판진에게 강력하게 항의해서 45분간 경기가 중단되었는데, 어떻게든 팩트 경기를 막기 위해 투수의 컨디션을 떨어뜨리기 위한 작전이었다. 하지만 김경홍은 이후 두 타자를 모두 삼진처리해 버린다. 현재까지도 일본의 좌타자 퍼팩트 기록은 이게 유일하다. 이후 김경홍은 1951년부터 1964년까지 14년 연속 20승과 14년 연속 45경기 이상 등판과 300이닝 이상 투구, 14완투승을 기록한다. 64와 1/3이닝 연속 무실점이라는 대기록도 세웠다. 무엇보다 당시 리그 최약체팀이던 소속팀에서 거둔 기록이라 더 가치가 있다. 일본 야구를 대표하며 미스터 베이스볼이라 불리며 일본 프로야구를 데뷔하는 나가시마 시게오가 처음 프로에 데뷔해서 사람들이 호들갑을 떨자 김경홍은 '4번 모두 삼진으로 처리하겠다'고 공언한 후 실제 4연속 삼진으로 처리한 일화가 유명하다. 시 구속이 160km가 넘었을 것이라는 얘기도 있으며 MLB에서도 오퍼가 왔으나 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선수생활 말년에 자신이 가장 '밥'으로 생각하던(본인 왈 교진 경기는 TV에 많이 중계되니까 더 열심히 던졌다고 한다...) 요미우리로 이적하여 당시 몸관리의 개념이 없었던 선수들에게 이를 전파하기도 했다. '식사도 훈련의 일환'이라며 식습관의 중요성을 전파하기도 했으며, 벤치클리어링때에도 왼팔을 보호하기 위해 수건을 왼팔에 두룬 채 뛰어나갔다고 한다. 고참 선수임에도 몸관리에 철저해서 '연습기계', '연습벌레'라고 불렸다. "연습은 최고의 컨디션으로 해야 한다"라며 애프터 케어의 중요성을 어필하기도 했다. 요미우리의 가와가미 감독은 김경홍의 큰 무대 경험을 높이 사 일본시리즈 1선발, 페넌트레이스 개막전 선발 등 결정적인 시합에는 항상 김경홍을 선발로 내세웠다. 요미우리에서 일본시리즈 우승도 일구고 개인통산 400승 기록을 기록하고 은퇴했다. 본인은 100승은 더 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당시 구단주 이시하라 신타로의 "그 누구도 당신이 얻어맞는 경기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신은 카네다 마사이치니까" 라는 말에 감동받아 은퇴한다.



     은퇴 후에는 해설가와 탤런트로 활약하기도 했고 롯데 오리온즈(현 마린즈)의 감독으로 재직하면서 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우승도 재패한다. 여담으로 스왈로우 시절 약팀에 어울리지 않는 대투수였기 때문에 감독도 함부로 터치하지 못해서 '원맨 카네다', '카네다 천황'이라는 별명이 붙었으며 다혈질의 욱하는 성격 때문에 선수때나 감독때 툭하면 퇴장당하기도 했다. 총 8번의 퇴장 기록으로 터피 로즈가 경신하기 전까지 일본프로야구 최다 퇴장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한번은 심판과 싸우다 심판을 폭행하고 경기 후에도 "심판이 엉터리다. 자기만 옳다는 식의 심판이 없어질 때까지 몇번이고 더 하겠다"고 인터뷰하자 그날 구심을 맡았던 심판이 "이런 인간이 있는데서 어떻게 심판을 하겠느냐"고 격분하자 시즌 도중 사표를 내 버리는 사고도 있었다. 여러 해 동안 불펜에서 자신의 연습투구를 받아 주다가 손가락 마비의 후유증을 얻은 고교 동창생 포수가 고향에서 주유소를 차릴 때 적잖은 자금을 쾌척해서 개업을 도와준 미담도 있다. 일본에서는 재일교포들의 우상이었고 신격호 롯데 회장 및 이건희 회장과도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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