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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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불교정책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5. 1. 24. 00:10
조선 초기의 왕들은 불교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불교 사찰의 재산을 국가에 환수하는 반면 왕실의 불사나 개인적 신앙에는 열심인 경우가 많았다. 태조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대부 신하들의 억불책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상왕이 된 후에도 태종의 불교 억제책에 반발하기도 했다. 전국의 유교 사찰은 242개만 남겨놓고 그 외 모든 사찰의 토지와 노비를 환수하는 역불 정책을 대대적으로 시킨 태종도 왕실에 우환이 있을 때는 궁궐에서 불사를 열었고, 태조나 왕비가 위독했을 때는 직접 불공을 올리기도 했다. 세종 역시 초기엔 불교 억제 정책을 강화하였으나 말기에는 불교에 대한 숭배가 과도하여 신하들이 반발을 하기도 했다. 세조는 대군 시절부터 많은 불사를 주관 하였으며 왕위에 오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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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명재상 정홍순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5. 1. 18. 00:10
정홍순(鄭弘淳, 1720 ~ 1784). 조선 후기의 호조판서, 동래 사람으로 아호는 호천이라 하였다. 예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영조 21년 정시문과에 급제한 후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호조판서가 되었다. 호조판서로 있는 10년 동안 재정 문제에 특히 능해 당대 제일의 재정관으로 명성을 떨쳤다. 호조판서는 나라의 재정을 다스리는 직이라 여러 구설수에 오르는 일이 잦아 단명할 경우 1년을 넘지 못하는 직책이었다. 하지만 그는 재정관으로 10년(햇수로 11년)을 역임했는데 이는 조선 역사상 최장기록이다. 청렴결백하고 일 잘하기로 유명했으며 암행어사로도 활동하여 부패함 탐관오리들을 적발했다. 매사에 청렴하며 재정관으로서의 역할은 물론 가사에 있어서도 검소와 절약을 바탕으로 한 생활태도를 견지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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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대 중국 사신 외교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4. 7. 27. 00:10
조선에서 중국에 보내는 사신은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조선 전기에는 명나라에 보내는 사신을 신을 ' 조천사(朝天使)'라 했으며, 조선 후기에는 청나라의 도읍인 연경(燕京: 北京)에 간 사신이란 의미로 '연행사(燕行使)'라 했다. 기본적으로 해마다 정례행사로 4번의 사신을 파견했고 그 외에도 수시로 임시사행을 파견했다. 기본적으로 조선의 대 중국 외교 스탠스는 대중국 관계를 사대(事大)라 하여 주종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반면 일본과의 관계는 교린(交隣)이라 하였다) 명나라는 중국의 정통 왕조라고 생각했지만 청나라는 정복왕조라 간주, 어쩔 수 없이 주종적은 사대 관계를 맺은 것이지 자의적인 교섭은 아니다고 생각했다. 명에 보내는 사신은 조천사라 하지만 청때는 연행사라 이름을 달리 한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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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썼던 종이와 목면으로 만든 갑옷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4. 4. 13. 00:20
닥나무 종이로 만든 조선의 한지는 질기고 오래가서 옷을 만드는데도 사용되었다. 또한 여러겹을 겹치면 적의 화살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에 조선 초기부터 갑옷을 제작하는데 사용하였다. 조선 전기부터 종이를 여러 겹으로 겹쳐서 작은 조각을 만들고 이 조각들을 사슴가죽이나 실로 엮어서 만든 찰갑의 구조로 제작한 지찰갑과 종이와 천으로 조끼 모양을 만들어 가슴과 등을 방호할 수 있는 지포엄심갑 등이 제작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종이를 10~15선 두께로 누벼서 만든 것으로 그리피스가 '은자의 나라 한국'에 소개한 지제배갑이 있다. 그리피스는 '현대 화기에는 견딜 수 없지만 옛날 화승총 정도는 견딜 수 있었을 것'이라고 묘사했다. 목화로 만든 목면갑은 조선 후기에 나타났다. 면포를 여러 겹으로 겹쳐서 만들었는데 창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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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번과 배우개그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3. 3. 20. 14:39
이숙번. 조선 전기의 문신. 조선 최초의 문과에 급제했으며 군사에도 밝은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이방원의 핵심 측근으로 이방원을 도와 세자 이방석과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웠고 조사의의 난 때도 도진무가 되어 직접 군을 지휘해 반란을 제압했다. 이러한 공로들을 인정받아 좌명공신 1등으로 좌찬성까지 올랐고 태종이 추진한 정치개혁을 성실히 수행했다. 하지만 원래 성품이 망령된데다 자신의 공과 태종의 총애만 믿고 안하무인의 권세를 휘둘렀는데, 거만방자하고 무례하여 국왕에게 불충하고 동료들에게 무례하게 굴었다고 한다. 결국 여러 차례 대간의 탄핵을 받아 한창 나이인 40대에 관작을 삭탈당하고 경상도 함양에 유배되어다.(왕권 강화를 위한 태종의 의지였다는 설도 있다. 실제 태종은 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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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가톨릭 전파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3. 2. 5. 23:59
조선 가톨릭 전파는 다른 나라들과는 진행 방식이 다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성리학에 대한 비판과 실학사항이 대두되면서 '서학'으로 천주교 교리가 들어오게 되었다. 중국을 통해 들어온 천주교 교리는 학자들을 중심으로 학문으로 성장했고, 18세기 후반부터 신앙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당시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선교사들은 중국은 고유의 전통과 높은 문화 수준을 가졌으므로 서양의 과학, 철학, 음악, 지리학 등 다양한 지식과 세계관을 전파해야만 중국 선교가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러 서양 학문을 들여오게 되었다. 이러한 '서학'을 조선의 지식인들이 중국에서 배워와 공부하면서 천주교의 '천주(天主)’와 유교에서 가리키는 ‘천(天)’을 연결하여 이해하게 되었고 천주교가 유교의 이해를 돕고 유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