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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스터리한 장영실의 말년
    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3. 7. 13.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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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생의 소생으로 태어나 부산 동래현에서 관노로 있던 장영실은 (그래서 부산에 장영실과학고등학교도 있었다. 현재는 부산과학고등학교로 개명) 어려서부터 그 손재주가 남달라 태종 때부터 이름이 알려졌다고 한다. 동래현의 가뭄을 수차를 이용해 해결하기도 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자 세종은 그를 한양으로 불러올렸다. 세종은 장영실의 노비 신분을 면천하고 종 5품 상의원 별좌에 임명하고 천문기기 제작과 왕실의 물품 제작, 수리 등을 맡겼다. 이후 장영실은 천문기구인 간의대와 혼천시계, 금속활자 갑인자의 주조, 최초의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와 천평일구, 우량계인 측우기와 하천범람여부를 알 수 있는 수표 등 수많은 발명을 해 낸다. 세종은 장영실을 매우 아꼈으며 정 5품 사직, 정 4품 호군을 거쳐 종 3품 대호군까지 올라간다. 그런데 장영실의 말년은 미스터리하게 사라진다. 공식기록은 임금의 가마제작을 했는데 그 가마가 파손되어 장형을 맞고 파직된 후 쫓겨났다고 하는데, 그 이후의 삶은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장영실을 지지하던 세종도 그를 감싸지 않았다.

    장영실이 마지막으로 제작한 것이 세종이 온천여행때 쓸 어가였다고 한다. 이 어가는 자신이 직접 움직일 수 있는 것이었다고 하는데(자동차?) 이 어가가 부서지는 사고가 일어나자 임금이 탈 승여를 튼튼하게 만들지 않았다는 대불경죄의 죄목으로 2등급 감형과 장형 80대를 맞고 파직되었다. 이후 공식문서에 그의 이름이 전혀 등장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가 그 가마의 실질적인 책임자도 아니었으며 천문은 물론 과학기술과 농업생산에 지대한 공을 세웠는데도 불구하고 장형과 함께 파직된 점, 세종도 굳이 그를 비호하지 않은 점 등으로 인해 그의 말년에 대해 여러 추측이 난무였다. 그가 은퇴하고자 하여, 혹은 그가 몸을 숨길 수밖에 없는 일이 발생하여 세종이 핑계를 대서 물러나게 해 주었다는 설(세종의 과학에 대한 관심과 천문에 대한 연구가 명나라의 불만을 초래했고, 사대주의 관점에 빠져 있던 다른 신하들이 한미한 출신인 장영실을 시기한 상황에서 명나라의 장영실 소환을 막기 위해 어가파손을 빌미로 퇴직시켰다는 설도 있다), 사실은 장영실이 엄청난 중죄를 저질렀는데 어가 파손을 핑계로 장형만 쳐서 내쫓았다는 설도 있다.

    반면, 장영실이 사실 당시에는 엄청난 과학자는 아니고 그냥 일 잘 하는 엔지니어였는데 마침 파직될 때 나이도 많고 그런 상황이다 보니 노환으로 죽었거나 병으로 복귀하지 못했다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어가 사건 때 장영실과 같이 파직 징계를 당한 사람들은 장영실을 제외하곤 나중에 다 복직이 되었다. 당시 장영실의 나이가 고령(정확한 나이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미 한양으로 올라올 때부터 30대 후반이었다고 하며, 이후 20여 년간을 조정에서 일했으니 파직될 때 나이가 환갑 전후였다고 추정된다)이었던 점도 감안하면 굳이 복직되지 않고 그냥 사망했고, 그 사실이 굳이 공문서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조선 초기의 문서들은 이후 벌어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전화 등으로 문서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그냥 '그의 행적이 미스터리 한 것이 아니라 그냥 남아 있는 문서가 없거나, 그냥 일반 기술직 중 하나라 문서에 남지 않은 것뿐인데, 후대에 이르러 장영실에 대한 평가가 매우 높아지다 보니 그의 행적이 사라진 데 대해 미스터리 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다'라는 드라이한 의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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