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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상륙작전이자 최고의 후퇴작전, 갈리폴리 전투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4. 6. 7. 00:20300x250
1차 세계대전 발발 후 1915년 연합군은 오스만 제국의 다르다넬스 해협을 장악하여 오스만 본토에 상륙하려고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갈리폴리 반도에 상륙해야 한다고 판단해서 갈리폴리 상륙작전을 진행한다. 당시 지휘관은 영국 해군 제독이었던 새크빌 카든이었는데 전역을 얼마 앞두고 있던 고령이었고 한가한 곳에서 수송 안전 호위 같은 일만 맡던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큰 작전을 맡게 되다 보니 신경쇠약으로 거의 병상에 누워있었다. 3월 18일 총공세 하루 전에도 입원을 해 버려서 존 로벡 제독이 대신 지휘를 했다.
14시경 원인 불명 오스만 군의 모든 통신 두절이 되는 일이 발생했고 잠시동안 포병사격의 틈이 생기는 일이 생겼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영&프 연합군이 밀고 들어왔는데 잠시후 통신이 회복이 되었다. 오스만 지휘부는 들어오고 있는 연합군에게 총공격을 개시했고 갑자기 쏟아진 포격에 연합군은 크게 당황했다. 그 와중에 몇몇 전함들이 포격을 피하려 급박하게 방향을 전환하려다 바닷속에 있는 기뢰를 건드리게 되었고 결국 3척 침몰, 3척 대파라는 손실을 입고 물러나게 된다.
이후 연합군은 이집트에서 한 달간 상륙준비를 한다. 지휘관도 영국 육군의 이안 해밀턴 장군으로 바꿨고 영국, 호주, 뉴질랜드, 일부 프랑스군 등으로 약 7만 8천명의 지중해원정군을 구성했다. 오스만 역시 다르다넬스 해협 일대에 8만 5천 병력을 집결시켰고 해안 접근로와 평지에 철조망과 지뢰를 설치했다. 당시 총책임자는 리만 폰 샌더스 독일군 군사고문이었는데 샌더스는 한 번 들어온 곳을 또 들어오겠냐며 연합군의 본토 습격을 대비, 본대 예비 병력을 최대한 확보하는 작전을 수립한다.
하지만 당시 오스만 19사단을 지휘하던 무스타파 케말의 생각이 달랐다.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케말은 연합군이 반드시 갈리폴리로 다시 올 것이라며 독일 군사고문단 계속 설득했다. 참고로 이 사람이 이후 터키공화국 대통령이 되는 케말 파샤이다. 결국 샌더스도 작전을 변경하여 4월 중순 주력을 해안가로 보내서 해안가 방어에 힘을 실었다.
4월 25일 연합군의 상륙작전이 개시되었다. 2만 5천의 안잭(ANZAC, 호주군과 뉴질랜드군의 연합군) 군단이 오늘날 안잭만이라 불리는 갈리폴리 서쪽에 상륙했다. 이들의 목적은 양동작전이었다. 갈리폴리 남단에 주 병력을 상륙시키기 위해 시선을 돌리는 미끼였던 것이다. 하지만 안잭 군단이 상륙한 곳은 상륙에 매우 불리한 지역이었다.(연합군은 지형 정찰도 제대로 안 했다) 매우 좁은 해안이 끝나자마자 절벽에 가까운 구릉지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반면 지형을 잘 알고 있던 오스만 군은 기관총과 박격포로 무장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원래는 해군이 엄호 포격을 하면 그 시간에 맞춰서 보병들이 상륙할 계획이었으나 서로 시계가 일치하지 않아 해군의 엄호사격이 모두 끝난 후에 병력이 상륙하여 피해가 막심했다. 하지만 사태 파악을 못한 최고사령부는 무조건 돌격 명령을 내렸고 안잭 군단은 상륙 첫날에만 2천 명의 사망자를 낸 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해안에 갇혔다.
4월 25일 갈리폴리 남단의 가바 데페와 헬레스 곶 등 다섯 포인트에 이틀에 걸쳐에 상륙한 본대도 상황은 그렇게 좋지 못했다. 이틀동안 2개 사단이 상륙했는데 여기에는 전통 있는 영국군 정예와 구르카 부대까지 투입해서 교두보를 확보했으며 크리시아라는 마을의 초입까지 전진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해안에서 겨우 7km밖에 진격하지 못한 것이다. 오스만 군의 준비 역시 철저했기 때문에 연합군의 피해도 엄청 컸다. 헬레스 곶에 상륙한 200명 중 해안에 도착한 병사는 21명뿐이었으며, 1000명이 상륙하였으나 마을 초입 도달한 병사는 300명뿐이었다. 연합군의 진격이 늦어지면서 오스만 본토 예비대가 증원되었고 지중해원정군은 해안으로부터 3km 이상 진출하지 못한 채 하루 평균 1천 명씩 사망했다. 4월 30일 오스만 군이 역습 작전을 펼쳤으나 이 때는 연합군이 버티기를 잘해서 오스만 군 1천여 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5월 6일부터 지중해원정군의 2차 상륙이 시작되었다. 이집트에서 2개 사단이 추가로 파견되어 상륙했는데, 이번에도 제대로 된 지형정찰을 안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오스만 군은 1차 상륙 이후 해변의 병력과 방어를 강화하고 있었는데 연합군은 오스만 군이 방어 시설을 강화하지 않고 그대로 뒀을 거라고 생각하고 상륙했고, 결과적으로 이틀간 1천 명의 전사상자가 발생했다. 5월 19일에는 오스만 군이 상륙해 있던 안잭 군단에 대해 2차 공세를 펼쳤는데 이 사실이 연합군의 항공 정찰에 미리 걸리고 말았다. 또한 오스만 군은 안잭 군단에게 기습 공격을 하기 위해 포격 지원을 받지 않고 육탄공격을 실시했고 무장을 가볍게 하고 돌격했는데 미리 준비하고 있던 안잭군단에게 3천 명이 전사하고 1만 명이 부상하는 원인이 되었다.
전투는 몇 달간 소강상태를 지내다가 지중해원정군은 8월 6일 3차 상륙작전을 실시한다. 수블라 만에 2개 사단을 투입 후 기존 병력과 함께 오스만 군을 공격할 계획이었으나 이번에도 갈리폴리의 지형이 발목을 잡았다. 워낙에 험한 지형이라 병력을 집결시킬 수가 없어서 분산되었기 때문에 전투는 혼전 양상을 띄었다. 이안 해밀턴 장군은 8월 7일부터 6개 사단 상륙을 축차적으로 투입했으나 새로 상륙한 부대들 역시 지루한 소모전을 펼쳤다.
이안 해밀턴 장군은 추가 병력 9만 5천명을 보내달라고 본국에 요청했으나 당시 영국 본토에 남은 병력이 2만 명뿐이었다. 결국 8월 20일 이후 지중해 원정군 완전 방어로 전환했고 10월까지 방어만 하는 마치 서부전선과 같은 전선이 생겼다. 결국 본국에서 철수하자는 여론이 높아졌고 이안 해밀턴은 이를 거부하다 교체되었다. 새 사령관으로 취임한 찰스 먼로는 갈리폴리에서 철수할 것을 건의했는데 이번엔 영국 의회에서 철수를 반대한다며 태클을 걸었다. 결국 군 수뇌부도 사수를 지시했다.
첫 상륙 이후 10개월 동안 양 군 합쳐서 14만 명이 전사했고, 연합군 입장에서는 해안에서 겨우 7km밖에 들어오지 못한 상황에서 결국 그 해 겨울 영국의 전쟁부장관 허버트 키치너가 현장을 시찰한 후 철수가 승인되었다. 워낙 많은 병력과 물자가 투입되었기 때문에 철수 계획 수립과 실행도 쉽지 않았다. 결국 12월 19일부터 2개월 여에 걸쳐서 철수가 시작되었다.
특이한 점은 지중해원정군이 철수할 때 병력 손실이 없었다는 것이다. 오스만 군은 철수하는 병력을 공격하지 않고 철수 후 기지를 조심스럽게 살피고 갈 뿐이었다. 철수 때 공격을 당하지 않은 이유는 일단 연합군이 철수를 할 때 야밤에만 인력을 이용해 모든 장비에 타르를 발라 가며 조심조심 철수를 했고, 철저히 기만 전술을 실시하여 철수할 거라는 예측을 하지 못하게 했으며, 철수를 할 때 남은 탄약과 물자 등을 이용해 곳곳에 함정과 부비트랩을 설치했기 때문에 오스만 군이 이를 확인하느라 공세로 나서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다음 해 1월 9일까지 8만 3천 병력, 4천6백 필의 말, 1천7백 대의 차량, 186문의 포병화기가 철수했는데 이렇게 많은 병력이 큰 피해 없이 철수 이례적인 일이다. 결과적으로는 역사상 최악의 상륙작전과 최고의 후퇴작전이 한 곳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갈리폴리 전투는 결과적으로는 오스만 군의 승리로 봐야 하는데 오스만 승리의 원인으로는
1. 갈리폴리의 험한 지형
2. 이곳이 뚫리면 본국까지 끝장난다는 오스만 군의 애국심
3. 연합군의 수많은 뻘짓
으로 정리할 수 있다.
전쟁 영웅이 된 케말은 장군으로 진급하였으며 그를 따르는 세력들이 늘어나면서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그는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에 오를 수 있었다. 반면 윈스턴 처칠에게는 최악의 실패였다. 처칠의 정적들은 "처칠의 오만함이 보기 싫다면 '갈리폴리 전투에서 넌 뭐 했냐'라고 말해라. 그러면 대꾸도 못한다."며 비웃었다고 하며, 실제로 처칠은 이 말만 들으면 크게 화를 냈고 그의 지인들은 그 앞에선 절대 갈리폴리 얘기를 거론하지 않았다.300x250'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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