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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이 무덤도 내버린 친일매국노 송병준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4. 11. 20. 14:56300x250
송병준. 대한제국 당시 친일매국노로 정미칠적(1907년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인 정미 7조약에 찬성한 7명의 매국노) 중 하나이다. 대한제국 농상공부대신과 내부대신, 조선귀족 백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역임한 친일 반민족행위자이다. 친일매국노로는 이완용이 가장 유명하지만 악질로는 송병준을 한 수 위로 보는 평가가 많다. 특별한 사상이나 신념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수많은 이권에 개입했고 남의 재산을 횡령하여 축재하고 주색잡기에 여념이 없었다고 한다. 기생의 딸로 태어났으나 타고난 처세술로 순종의 장인인 민태호를 뒷배로 삼아 승승장구했다. 메이지 유신 무렵에 총을 팔아 떼돈을 번 '죽음의 상인' 오쿠라 기하치로와 만나 부산에서 고리대금업과 무역업을 겸하는 부산상관을 설립하여 친일매국행각으로 큰 재산을 모았으나 임오군란 때 상관이 불에 타자 생명의 위험을 느껴 일본으로 도망갔다.
이후 자신이 일본 전문가라는 점을 내세워 민씨 세력에 줄을 대어 높은 관직에 올랐다.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나고 박영효, 김옥균 등이 일본으로 망명하자 명성황후에게서 이들을 암살하도록 밀명을 받았으나 일본에 가서 주색에 빠져 놀다가 그냥 왔다. 이후 동학과도 연을 맺었는데 그 배경을 이용해 민씨 일파의 동학 첩자 활동을 했다. 이후 의화군 일본 특파대사의 파견 시 수행원으로 따라갔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자 조선 내부에 자신의 끈이 떨어진 것을 직감하고 일본에 눌러앉게 된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오타니 기쿠조 병참감의 통역인 신분으로 귀국했다. 귀국 후 친일단체를 만들고 유력인사를 친일화하는 작업을 하면서 국내 정세와 요인들의 동향을 일본 당국에 보고했다. 일진회라는 친일매국단체를 만든 것도 그가 만들어 낸 '성과'였다. 을사늑약 이후 일본 우익의 하수인이 된 송병준과 일진회의 위세는 더욱 높아졌다. 이준 열사의 헤이그밀사 사건이 터지자 칼을 차고 어전회의에 들어가 고종에게 일왕에게 사죄하고 자결하라고 윽박지르고 양위를 협박한 것도 송병준이었다. 일진회는 '합방 청원 운동'을 벌였으며 결국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당하며 조선은 일제에 강점된다.
송병준은 매국의 공로로 자작위와 은사금 10만 원(현재 한화가치로 약 10억 원)을 받았고, 일본 국왕으로부터 금시계를 받는 영광도 누렸다. 일본 국왕을 만난 자리에서 일왕을 '살아 있는 신'이라 칭송했다고 한다. 그밖에 홋카이도에 광대한 목장을 하사 받았으며, 1920년에는 백작으로 승급하였다. 중추원 고문과 경성상업회의소 특별평의원, 경기도 참사 등을 지낸 그는 3.1 운동이 일어나자 재빨리 도쿄로 달아나서 일본 정계 요인들과 함께 만세 수습책을 논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1925년 뇌일혈로 사망했는데 매판자본가인 한상룡이 주최한 연회에서 독살당했다는 설도 있다.
송병준의 백작 작위는 아들 송종헌이 물려받았다. 송준헌 역시 전국 각지의 송병준의 토지를 관리하며 일제치하 당시 적극적인 친일 행적을 벌였다. 그러다 해방 이후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1년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조사를 받던 중 향년 72세의 나이로 옥살이 중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했다. 송병준의 사위는 구연수로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의 시체에 석유를 뿌려 소각하는 일을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던 인물이다. 외손자인 구용서는 도쿄상대를 졸업하고 조선은행 도쿄지점에 들어갔는데 광복 이후 조선은행 부총재 호시노가 면직되면서 하루아침에 부총재의 자리로 올라가는 행운을 얻게 된다. 이후 조선은행이 한국은행으로 개편되면서 한국은행의 초대 총재가 되었다. 송병준의 손자 송재구는 일본에서 메이지 대학을 나온 뒤 30년대에 홋카이도에서 '조선 목장'을 경영했다고 한다.
2007년 5월 2일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는 친일파 송병준과 송종헌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정했는데, 송병준의 증손자 송돈호가 이에 반발, 여러 차례 소송을 걸었다. 그 과정에서 '증조부는 가난한 조선을 일본 힘으로 발전시키려는 애국자였다'라고 일본 언론에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송병준의 묘는 송돈호가 다른 사람에게 이미 판 땅에 있었는데 땅을 팔면서도 송병준의 묘를 이장하지 않고 그냥 놔두어서 행정처분 이후 파묘했다. 송돈호는 역삼동에서 건설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송병준과 송종헌의 땅을 되찾겠다며 소송을 걸었으나 패소했다. 이 과정에서 토지 브로커들과의 각종 사기 행각을 벌인 게 밝혀져 구속되기도 했다. 출소 이후 친일파의 재산의 국가 귀속이 위헌이라고 헌법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 후 잠적하였다. 항간에는 자식들에게 친일파 후손이라는 오명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일본 영주권을 취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송돈호의 배다른 형 송준호는 조부가 반민특위에 체포되고 부유했던 집안이 풍비박산 나자 충격에 빠져 방탕한 유랑생활을 보내다 기독교 선교단체가 운영하는 돌봄시설에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300x250'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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