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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제로 매우 심각했다는 사도세자의 광증
    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5. 9. 14.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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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세자는 어려서 매우 영특하여 3세 때 효경을 읽고 소학의 예를 실천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공부를 멀리하고 상궁들이 갖고 온 칼과 칼집을 가지고 전쟁놀이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게다가 전쟁놀이를 하고서도 공부를 했다고 거짓말을 하는 등 거짓말이 늘어 영조가 매우 화를 내면서 꾸짖었고, 이와 관련해 상궁 둘에게 호된 형벌을 받다 결국 죽는 일도 있었다.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 의하면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사도세자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 대한 극심한 공포와 불안에 떨었다고 한다. 영조 앞에서는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했다고 하는데 영조가 거의 아동학대 수준으로 대하자 세자는 차츰 이상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땅을 파고 들어가 눕거나 골방에 틀어박혀 온종이 나오지 않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한중록에 보면 세자의 살인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세자는 아무 옷이나 입지 못하는 '의대증'이라고 하는 일종의 강박증을 앓고 있었다고 하는데 옷을 한 벌 입으려면 옷이 수십 벌이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분노를 통제하지 못해 시중을 드는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다. 의대증 외에 벼락을 무서워하는 뇌벽증도 있었다.

    1757년에는 갈아입은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내관 김한채의 목을 베어 그것을 들고 돌아다녔다고 하는데 이 날 세자는 김한채를 포함하여 6명의 내관을 죽였다. 또한 사도세자의 분노는 언제나 궁녀와 내시, 나인 등 약자들을 대상으로 했다. 영조 34년인 1758년 영조가 세자가 내관들을 죽인 사실을 알게 되고 사도세자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세자가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지 않으시어 서럽고 꾸중하시기에 무서워 심화를 얻었다."라고 답한 일이 있었다. 영조는 깊이 한숨을 쉬며 "내 이제는 그리 않으리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도세자의 살인 행각은 계속되었다. 친모 영빈 이씨의 내인도 죽였고, 물품을 늦게 가져온다고 내수사 담당 내시도 죽였으며, 점친 게 맘에 안 든다고 맹인 점쟁이도 죽였고, 평양행 잠행을 수행한 내시 유인석도 죽였다. 1760년에는 세자빈인 혜경궁 홍씨에게 바둑판을 던져 눈알이 빠질 뻔할 정도로 다치게 한 사건이 일어났으며 1761년엔 자신의 후궁 빙애(경빈 박 씨)를 손으로 때려죽이고, 둘 사이에 난 아들 은전군을 연못에 던져버린 일도 있었다. 다행히 아기는 연잎에 얹혔고 시중들이 급히 건져내어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이때쯤부터 세자는 단순히 죽이는 것에 끝나지 않았다. 궁녀 뿐만 아니라 비구니들을 잡아다가 때리고 성폭행했는데 때려서 피투성이가 된 궁녀와 성관계를 대놓고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인두로 고문도 했는데 이는 영조가 재위 초반에 너무 잔혹하다며 금지한 형벌이었다. 그밖에 유람과 사치에 열중했다고 하는데 내관을 자신으로 연기시켜 놓고 영조도 모르게 평안도 유람을 나간 적도 있었다. (왕족이 왕의 허락 없이 도성 밖을 함부로 나서는 건 당시로선 있을 수 없는 관례였다.) 그밖에 유람이나 도성 밖 행차를 했는데 그 와중에 부녀자를 집단강간하거나 백성들의 금품을 갈취하거나 이유 없이 때려죽이는 일도 있었다. 또한 연회나 하사품 구입으로 세자궁 예산이 바닥나 시전 장인들에게 돈을 빌렸다가 나중에 영조가 알게 되어 국고로 메꿔 준 일도 있었다.

    한중록과 대천록(정조가 사도세자 사건에 대한 일을 정리한 책)에 따르면 사도세자가 이렇게 죽인 사람의 수가 백여명에 달한다고 나와 있다. 또한 승정원일기에서 사도세자의 행동이 100여 곳 이상 빠지고 세초되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기록이 이 정도니 실제로는 사도세자가 입힌 피해가 그보다 더 많았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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